시냇물이나 강물이 흐르는 곳을 건너기 위해서는 다리를 놓아 통행을 편리하게 한다. 예전에는 조그마한 도랑이나 얕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널찍하고 평평한 징검돌을 보폭 넓이로 줄지어 놓고서 건너편으로 쉽게 갈 수 있게 활용하였다.
이 징검다리를 딛고서 건너편으로 건너갈 때, 방금 건너온 징검다리가 평평하고 좋게 보여 자기 맘에 든다고 해서 그 징검다리용 돌을 들고 가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또 건너편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고 그중 한 돌이 아주 좋고 귀하며 편리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돌 위에 마냥 머물러 있는 사람도 없어야 한다.
만약 징검다리용 돌을 들고 가거나, 그 돌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정신 나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다.
징검돌을 들고 가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자기 인생의 강이 있어 그 강을 건너야 하며 건너갈 수밖에 없다. 인생의 강을 건너는데 그 강폭이 약간은 좁은 사람도 있고 조금은 넓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강폭에 상관없이 몇 개의 징검다리는 필요하고 꼭 있어야 하며 또한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부모라는 징검다리를 딛고 성장하며 건너간다. 이때 부모는 기꺼이 징검다리가 돼주고 징검다리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부모의 헌신과 은공으로 잘 성장한 자녀 된 입장에서도 상황이 주어지면 자신이 부모에게 징검다리가 돼 드리고, 효도하며 은혜를 갚으려는 가상한 마음으로 그 몫을 다하기도 한다.
반면 성장한 자녀가 기꺼이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홀로서기를 해서 자기 인생의 강을 자신이 건너려 하지 않고 그 징검다리에 계속해 머물러 있으려 한다면 낭패다.
부모 된 입장에서도 자녀에게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든, 아니면 자녀를 징검다리 삼고 있든, 그 자녀를 자기라는 징검다리 위에 계속해서 머물게 하려는 경우도 있다. 징검다리가 되어 주는 자녀를 들고 가려 하듯 자기 소관 아래에 놔두려 하고, 자녀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 하며, 쥐락펴락 개입해 독립을 방해한다면 이 또한 큰일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극히 일반적인 상황인데도 의식이 유아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새끼가 장성할 때까지는 극진히 보살펴 주지만 성체가 되면 어미나 새끼 모두 둥지를 떠나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신 계획과 의도가 있으시기에 인생으로 보내시어 각자 자기 인생의 강을 건너게 하시고 제 몫을 하며 제 길을 가게 하신다.
콘크리트 건물을 지으면 바닥에 기초하든지 기둥을 세울 때는 거푸집이라 하여 외부에 나무 합판이나 철판으로 외형의 틀을 만들어 세운다. 이 외형의 틀 안에 콘크리트를 지어부은 후 바닥기초나 기둥이 세워지고 건조되면 거푸집을 벗겨 떼어낸다. 거푸집은 거푸집으로서 역할을 마쳤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는 자녀의 거푸집으로서 보호자의 역할과 홀로서기의 도우미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의 거푸집으로 끝내 남아 있으려 하든지, 자녀도 거푸집을 계속 붙잡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와 자녀는 함께 망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건너편에서 팔을 벌리시고 주님 품을 향해 바르게 건너오라고 기다리고 계신다. 인생의 강 건너편의 주님 품을 목표로 하고 가는 삶의 여정에서 가족이나 재물과 명예 등의 징검다리에 안주하지 말기를. 잠시 딛고 잘 건너가는 인생의 승리자들이 다 되어야만 한다.
김원상 목사·드림업 편집위원
[기고] 징검다리
입력 2019-01-29 2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