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 ‘증인’에서 자폐 소녀 지우(김향기)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신을 증인으로 세우고자 매일같이 찾아와 선의를 베푸는 변호사 순호(정우성)를 향해서다. 순호는 그러나 선뜻 답하지 못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그 한마디가 살포시 날아와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다음 달 13일 개봉하는 ‘증인’은 서로를 통해 한 발짝 성장하는 자폐 소녀와 변호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여러 ‘벽’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한편으론 우리가 사는 모습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달리고 있진 않는지, 편견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진 않는지.
‘완득이’(2011) ‘우아한 거짓말’(2013) 등을 연출한 이한 감독 특유의 따뜻한 감성과 섬세한 화법이 돋보인다. 배역에 완전히 녹아든 배우들은 정다운 앙상블로 진한 여운을 빚어낸다. 극의 중심축 역할을 해낸 배우 김향기(19)와 정우성(46)을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각각 만났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춘기 소녀를 사랑스럽게 연기해낸 김향기는 “처음엔 부담감이 컸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영화가 공개됐을 때 지우와 같은 친구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감독님께서 준비해주신 책이나 영상 자료들을 살펴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말투나 손동작을 계산하며 대본을 읽고 있더라고요. 왜 이러고 있나 싶었죠. 그때부터는 현장에서 소통하며 느끼는 감정들을 그대로 표현했어요. 점점 부담을 덜었죠.”
김향기는 “영화를 찍으면서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그동안 ‘다름’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가까워지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규정짓고 벽을 쳤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우리 영화를 통해 관객들께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셨으면 좋겠다. 밝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만족스럽다”고 했다.
상대 배우 정우성과의 인연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3세 때 베이커리 광고를 함께 찍었다. “정말 편안한 느낌을 주는 분이세요. 대중에게는 ‘멋있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타고난 배려심을 지니신 데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또한 훌륭하시죠.”
광고 모델로 얼떨결에 데뷔했으나 그의 인생에서 연기가 차지하는 부분은 점점 커지고 있다. 절실히 느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1년 정도 활동을 쉬면서 문득 ‘촬영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좋아하게 되면서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점점 책임감도 커진 것 같아요.”
지난해 ‘신과함께-죄와 벌’과 ‘신과함께-인과 연’으로 ‘쌍천만’ 흥행을 맛보기도 했다. 김향기는 “주변에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사실 그리 실감이 나진 않는다. 아직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을 만난 것이 복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우성은 ‘증인’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출연을 결정했다. 스스로 치유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작들에선 특정 상황 안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거나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움켜쥐는 캐릭터들을 주로 연기했는데 순호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편안했다”고 털어놨다.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극 중 지우와의 교류나 치매 아버지(박근형)와의 관계를 통해 보듬음을 받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죠. 정말 원 없이, 마음 편하게 현장을 즐겼어요. 공기 좋은 숲속에서 숨쉬는 듯한 기분이었달까요. 일을 했다기보다 쉼을 얻은 것 같아요.”
일상성을 지닌 캐릭터에 대한 갈증도 있었다. 정우성은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상 일상의 아름다움과 찬란함에 대한 환상이나 결핍, 욕구가 늘 있다. 순호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면서 “별다른 캐릭터 디자인은 하지 않았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김향기와의 연기 호흡은 처음이다. 과거 광고를 함께 찍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됐다. 그때 그 아기가 오늘날 어엿하게 성장한 김향기일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는 그다. 정우성은 공식 석상에서 김향기를 ‘동료 배우’ 혹은 ‘파트너’라고 표현하는데, 상대에 대한 깊은 존중이 느껴진다.
“한 무대에 올라갔을 때는 나이나 경력에 상관없이 동등한 배우인 거죠. 서로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 되는 거고요. 후배라고 무슨 충고를 하기보다는 그저 현장에 임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상대를 통해 내가 깨우칠 수 있는 부분도 있겠고요.”
정우성에게 ‘좋은 사람’의 정의를 묻자 그는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답을 돌려줬다. “나의 직업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의 의미를 일깨우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러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습니다.”
권남영 기자
‘증인’ 정우성x김향기, 다름을 이해하니 찾아오는 평온함 [인터뷰]
입력 2019-01-28 0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