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시절 ‘강남엄마 따라잡기’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 2007년이었다. 변화하는 한국사회 풍속도를 멀리서나마 따라잡아 보리라는 의도도 있었다. 한국의 교육열이 너무 심하구나 혀를 차며 보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는 낭만적인 호시절이었다. 가난한 싱글맘이 식당일, 대리운전 해 가면서 강남엄마들을 따라잡아 보겠다는 마음이라도 먹어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2018년 작 스카이 캐슬을 보면 불과 11년 만에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 현기증이 난다. 입시의 풍속만이 아니라 빈부격차, 가진 자의 허영 등 그 짧은 시간에 한국은 숨 막히는 나라가 됐다. 수도권 집중은 지방을 소외시켰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강남 집중을 낳으며 강북의 기를 죽였다. 강남에 사는 사람들도 잘 나가는 특정단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껴야 한다. 그 특정 단지 내에서도 경쟁은 숨 막힌다. 기죽지 않으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입시는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가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환부인지도 모른다. 아이들도 아프고, 어른들도 아프다. 많이 가진 이들도 행복하지 않다. JTBC 뉴스데스크는 이 드라마와 관련 ‘SKY 캐슬…하늘 위의 허망한 성’이라는 제목의 앵커 브리핑을 냈다. 예리한 비평이다. 하지만 교정하고픈 대목이 있다. 흔히 하늘이라고 번역하는 영어 단어가 두 개 있다. sky와 heaven이다. sky는 구름이 있고 해, 달, 별이 있는 창공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은 heaven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두 단어의 차이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창공(sky)을 날을 때 거기에는 언제나 클래스(class)가 있다. 퍼스트 클래스, 비즈니스 클래스, 평범한 사람들이 타는 이코노미 클래스가 그것이다. 그러나 하늘(heaven)에는 어떤 계급(class)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경제적 계급과 사회적 평판을 가로질러서 다양한 사람들과 막역하게 어울렸다. 서로의 이해관계를 따져가며 사람을 사귀던 문화, 갖가지 이유로 타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던 종교에 큰 충격이 되었다. 그런 파격적인 개방성은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요인이다.
그 삶은 이 땅에 임한 하늘이었다. 그가 가르쳤던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이라는 기도를 삶으로 옮긴 것이었다. 초대교회는 이 파격을 이어받았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고 선언하며 그들이 이미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음을 알려주었다. 교회가 그 선언을 현실로 살아낼 때 세상의 빛과 소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논리를 따라 계급적 질서에 의지하고 차별과 배제의 편에 설 때 복음이 갖는 독특한 능력은 빛을 잃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이 드라마 덕분에 sky는 한동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단어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 혼용해 오던 ‘창공’과 ‘하늘’을 구분해야 될 때가 된 것이다. 경쟁과 차별로 상징되는 sky와 평등과 용납, 상호존중으로 표현되는 heaven이 얼마나 다른가를 구분해 내어야 한다. 그 구분은 말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의 삶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허공에 띄운 성은 허망할지 모르지만, “하늘 위의 성”은 허망하지 않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남기신 족적만큼이나,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이들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만큼이나 현실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각 분야에서 차별을 줄여가고, 서로를 품어주는 문화를 만들어 갈 책임이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기도하는 이들의 당연한 사명이다. 그 땅에서 우리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꽃 피워갈 수 있도록!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
[바이블시론-박영호] 스카이는 하늘이 아니다
입력 2019-01-25 0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