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대법원장 첫 영장 심사… 사법부 치욕의 날

입력 2019-01-24 04:00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를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굳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서고 있다. 영장실질심사는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서울중앙지법 321호 법정에서 진행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심사가 끝난 뒤 서울구치소로 이동해 밤늦게까지 결과를 기다렸다. 권현구 기자

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 법원삼거리 일대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을 촉구하는 플래카드가 여러 개 걸렸다. 그의 얼굴에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연상케 하는 수염을 그린 벽보도 보였다. ‘사법농단과 재판거래로 국민을 죽여온 살인마 양승태를 당장 구속하라’ ‘흉악한 판사 양심보다 국민 참심제가 낫다’ 등 플래카드는 사법부 불신을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이날 ‘사법농단 의혹’의 최고 책임자로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았다. 사법부 수장이 피의자로 법정에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은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사법행정을 총괄했던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도 같은 날 자신이 모신 사법부 수장과 함께 두 번째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다.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동시 구속 심사를 받은 초유의 사태 앞에 법원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침묵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오전 10시24분쯤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했다. ‘전직 대법원장 최초로 구속의 기로에 놓였는데 심경이 어떠냐’는 질문에 굳은 표정으로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심사가 진행된 321호 법정으로 향했다.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 심리로 오전 10시30분 시작한 심사는 점심식사를 위한 30분 휴정을 포함해 오후 4시쯤까지 약 5시간30분간 진행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영장심사를 마치고 나오면서도 기자들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은 채 준비된 호송차를 타고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로 이동했다. 영장심사를 받은 피의자는 형사소송법에 따라 지정된 인치 장소에서 결과를 기다린다. 법원이 특별 예우 없이 구치소 인치를 결정함에 따라 그는 구치소에서 제공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유치실에서 심사 결과를 기다렸다.

검찰 측은 심사에 신봉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을 비롯, 수사 핵심 인력을 대거 투입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법관 블랙리스트 문건’, 강제징용 재판 개입 등을 직접 진두지휘한 정황을 제시하며 구속 수사 필요성을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날 직권남용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이 선고돼 법정 구속된 안태근 전 검사장 사례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검사장이 서지현 검사에 대한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직권남용죄가 인정된 것에 비춰볼 때 양 전 대법원장의 죄는 더 크다는 취지다.

반면 양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단은 직권남용죄 성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를 뜻하는 '대(大)'자가 적혀 있어 검찰이 핵심 증거로 내세웠던 이규진 부장판사의 업무수첩과 관련 "이 부장판사가 거짓으로 썼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법원을 나와서도 기자들의 질문에 굳게 입을 다물었다.

지난해 12월 한 차례 영장이 기각됐던 박 전 대법관의 두 번째 영장 심사는 양 전 대법원장보다 두 시간쯤 늦게 끝났다. 당초 심사는 약 7시간 만인 오후 5시20분쯤 끝났지만, 허 부장판사가 점심을 거른 박 전 대법관에게 식사를 권해 약 45분 뒤인 6시5분쯤 나와 구치소로 향했다. 박 전 대법관은 심사 도중 점심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10여분 쉰 것을 제외하고 7시간가량 법리 공방을 이어갔다.

법원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출근길 어두운 표정으로 대법원 청사로 들어갔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구속 여부와 무관하게 현재 처한 상황만으로도 너무나 참담한 심정"이라고 전했다.

법원 밖은 '구속 촉구'와 '구속 반대' 대치로 종일 혼란스러웠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 본부(법원노조)는 기자회견을 열고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을 촉구했다. 법원노조는 "사법농단의 몸통 범죄자 양승태를 구속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민주노총과 노동당, 전국금속노조 등이 잇따라 시위를 벌였다. 반대편 보수단체는 애국가를 크게 틀며 구속 반대를 외쳤다.

경찰은 충돌에 대비해 경찰 9개 중대를 투입해 양측이 각각 법원삼거리 서쪽과 동쪽에서 시위하도록 유도했다.

조민영 이가현 안대용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