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왜곡’ 논란에 문턱 ‘조금’ 높이려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입력 2019-01-26 04:02
청와대의 국민청원 개편을 위한 설문 공지.


지난해 9월 25일 새벽 부산 해운대구의 한 도로에서 만취한 20대가 BMW를 몰다 휴가 중이던 현역 군인과 친구를 덮쳤다. 이 사고로 카투사 복무 중이던 윤창호(당시 22세)씨는 의식불명 상태가 됐고, 함께 있던 친구 역시 중상을 입었다. ‘음주운전으로 친구 인생이 박살났습니다’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40만명 이상의 동의를 이끌어내면서 ‘윤창호’라는 이름은 음주운전 강력 처벌의 시급함을 알리는 대명사가 됐다.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를 냈을 때 법정형을 3년 이상 징역 또는 무기징역으로 상향 조정하고, 음주운전 적발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토록 해 국회가 통과시킨 법안에는 ‘윤창호법’이란 별칭이 붙었다.

지난해 2월 정형식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연루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하자 그를 파면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분노한 민심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으로 몰렸다. 청원이 올라온 지 사흘 만에 답변 요건인 20만명 선을 돌파했다. 하지만 단기간 쏟아진 국민적 분노에 비해 청와대의 답변은 원론적 수준에 그쳤다. “청와대가 재판에 관여하거나 판사를 징계할 권한은 없다”는 거였다.

국민이 물으면 청와대·정부가 답했다

2017년 8월 17일 출범한 청와대 국민청원 제도가 시행 1년5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청와대가 시행 500일(2018년 12월 29일)을 맞아 발표한 집계를 보면 전체 청원은 약 47만건이 올라왔고, 하루 평균 11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청원 가운데 68건이 ‘30일 이내 20만명 이상 동의’라는 요건을 충족해 청와대나 정부 관계자로부터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국민청원 제도는 ‘국민 중심’과 ‘개방성’을 표방한 문재인정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민 누구나 SNS를 통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 요건만 갖추면 어떤 청원이라도 청와대가 신속하게 답변하면서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국민청원의 비중이 커지면서 그날의 이슈가 즉각 반영되는 ‘이슈 판독기’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위에서 언급된 윤창호씨 사건도 자칫 잊혀질 뻔한 끔찍한 사고가 국민청원을 계기로 법 개정으로 이어진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 형성된 여론이 청원 게시판을 매개로 음주운전 처벌 강화라는 실질적 움직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면 애초 제도 도입 때 ‘답변 불가’ 사항을 명시하지 않다보니 정부의 권한 밖에 있는 사법부나 국회 관련 청원에도 청와대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답변했다. 국회의원 연봉 ‘셀프 인상’ 중단 등 국민의 요구는 구체적이었지만 청와대는 헌법 조항을 들고 와 ‘삼권분립’에 위배된다거나 답변 권한이 없다면서 청원을 마무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정형식 부장판사를 파면시켜 달라는 국민청원 역시 국정농단 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주요 피의자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이후 사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이슈였다. 청와대의 원론적 답변에 국민청원 실효성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주목 경쟁’으로 여론 왜곡 우려

‘요건만 갖추면 모든 이슈에 답한다’는 방침 외에 ‘20만명 이상 동의’라는 일률적 기준이 낳는 부정적 효과도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청와대가 답변한 청원 68건 가운데 치안 및 사회안전 관련 이슈가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 관악산 여고생 집단폭행 등 10대 강력범죄, 강서구 PC방 살인범 김성수와 거제 50대 여성 살인범에 대한 엄벌 청원, 아동학대와 성범죄 강력 처벌 청원 등이 국민적 공분 속에 20만명 이상의 참여를 이끌어냈고, 청와대와 정부는 제도 개선과 강력 처벌을 약속했다.

문제는 국민들이 청와대나 정부 부처와 직접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여론이 단기간에 응집하기 쉬운 이슈 위주로 돌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잔혹한 범죄자를 엄벌하고, 성범죄·아동학대·가정폭력 등 인권 사각지대를 좁히는 작업은 필수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업이 어려운 자영업자나 경제적 약자, 복지 소외계층 관련 이슈는 현재 기준을 충족시키기 쉽지 않다. 답변에 나선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 가운데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이철성·민갑룡 경찰청장, 김형연 청와대 법무비서관과 박형철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이 자주 등장한 것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국민청원’에서 이슈 간 불균형이 발생하는 셈이다.

‘20만명 동의’라는 기준이 부각되다보니 ‘이수역 폭행사건’과 같은 왜곡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당초 이 사건은 온라인상에서 ‘여성혐오 폭행’으로 알려지면서 하루 만에 20만명 이상 동의를 이끌어내 경찰이 이례적으로 “사건 중대성을 고려해 신속히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장 동영상이 공개되고 경찰 조사를 진행한 결과 ‘쌍방 폭행’으로 결론 났다. 청와대 답변을 듣기 위해 ‘20만명 동의’를 넘겨야 한다는 일종의 ‘주목 경쟁’이 당초의 취지를 왜곡할 여지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내실 있는 소통 위한 과제는

청와대는 국민청원 ‘2기 개편’을 준비하면서 최근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20만명 동의의 적정성, 실명제 도입, 청원 동의 철회 및 삭제 기능 도입, 150명 이상 동의해야 청원을 공개하는 방식의 ‘1차 문턱’을 두는 방안 등이 포함됐다. 추후 논의를 거쳐 청원 공개방식과 답변 요건에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국민청원 개선방안으로 실명제 도입과 답변 거부요건 신설, 민간 SNS를 통한 로그인 지양 등을 제시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답변 기준을 정하는 문제 외에도 청와대가 ‘소통 방식’을 좀 더 내실 있게 바꿔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지금처럼 최종 결론만 국민들에게 공개하기보다 청원 관련 결론이 나오기까지 논의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정동재 한국행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은 25일 “개선 방향을 언급한 결론만 전달하다보니 국민들이 만족하지 못한 답변이 상당수 있다”며 “안건 논의에서 주무부처가 어디인지, 이해집단은 어떻게 형성돼 있는지, 문제를 해결할 대안은 어떤 방식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