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행동주의 펀드 KCGI, 조양호 일가 퇴진 ‘세몰이’ 시작

입력 2019-01-22 04:00

이른바 ‘강성부 펀드’로 불리는 한국형 행동주의 펀드 KCGI가 21일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등 대주주 일가를 공개 압박하고 나섰다. 제안서를 내고 한진그룹에 지배구조위원회 설치, 범죄행위를 저지른 사람의 임원 취임 금지 등을 요구했다. 금융권에선 사실상 조 회장 일가의 퇴진을 위한 ‘세몰이’가 시작됐다고 분석한다.

KCGI 제안은 국민연금이 지난 16일 한진칼 등에 대한 경영참여 여부를 본격 검토하기로 결정한 지 5일 만이다. 전문가들은 올해 연기금 등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본격화, 정부의 재벌 지배구조 개선 흐름과 맞물려 행동주의 펀드 활동이 더 활발해질 것으로 내다본다. 지배구조 개선, 주주친화정책 확대라는 순기능을 기대하는 시선과 과도한 경영 개입·간섭이 발생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엇갈린다.

KCGI는 이날 발표한 공개제안서와 별도 프레젠테이션(PT) 자료에서 한진그룹 지배구조의 문제점 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KCGI는 “과거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당시 조 회장 일가의 대한항공 총자산에 대한 실질적 소유권은 1.5%에 불과했다”며 “이런 일가의 일원(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구시대적 행태의 심각성은 더 충격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밖에 KCGI는 글로벌 항공사 대비 높은 부채비율 등을 한진그룹 위험 요소로 꼽았다.

KCGI는 한진그룹 내에 지배구조위원회 설치 등을 요구했다. KCGI 추천 사외이사 2인, 외부전문가 3인, 경영진 추천 사내이사 1인으로 구성해 지배구조 및 경영 관련 사항을 사전 검토·심의하자는 것이다. 사실상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겠다는 뜻이다. 조 회장 일가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KCGI는 회사 평판을 실추시킨 이는 임원 취임을 금지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조 회장 일가를 정면 겨냥한 조항으로 풀이된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KCGI와 한진그룹 측이 한진칼 사외이사 교체와 관련해 오는 3월 표 대결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도 3월에 임기가 끝난다. 사내이사인 조 회장의 임기는 아직 남아 있지만, KCGI가 우호지분을 늘리면 장기적으로 ‘압박카드’가 될 수 있다. KCGI의 한진칼 지분은 10.81%이고, 조 회장 일가는 28.93%를 갖고 있다. 국민연금도 7.34%를 보유 중이다. 향후 국민연금의 행보도 변수가 될 수 있다.

KCGI의 제안서 곳곳에선 일반 소액주주 등을 규합하려는 의도도 엿보였다. 그간 한국에서 대주주의 독단적 의사결정으로 그룹 전체가 위험해지는 사례가 많았다며 일반 국민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KCGI는 한진그룹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웹사이트 ‘밸류한진(valuehanjin.com)’을 열고 “주주들의 연락을 기다린다”고 밝히기도 했다. 별도 PT 자료와 웹사이트 개설을 통해 주주 동의를 구하는 건 글로벌 행동주의 투자업계의 거물인 빌 애크먼이 애용하던 방식이기도 하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취약한 지배구조, 정부 정책, 조 회장 일가의 ‘갑질 논란’에 따른 국민 반감 등이 작용해 한진그룹이 행동주의 펀드의 유력 타깃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 사냥꾼’ 등 부정적 이미지로 알려졌지만 전문가들은 지배구조 개선, 배당 확대 등의 순기능도 있다고 본다. 한국투자증권 윤태호 연구원은 “스튜어드십 코드 효과 등과 맞물리면서 3월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기업들의 배당 발표 등 선제 대응이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배당정책 개선이 대형주에서 중형주, 소형주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최근에는 한국형 행동주의 펀드인 플랫폼파트너스가 맥쿼리인프라를 압박하면서 펀드 수수료 인하를 끌어내기도 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