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 임시정부 청사 터에 아파트를 짓는다는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 외교부에도 이를 알렸고, 김구 선생 아들인 김신씨에게도 급히 전보를 보냈죠.”
기자가 임시정부 100주년 취재를 위해 최근 충칭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만난 사람 이소심(80) 여사는 1990년 충칭 임정 청사가 헐릴 위기에 처했을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 여사는 한쪽 눈을 실명해 아들의 부축을 받아야 거동이 가능하지만 임정 청사 근처 호텔 커피숍까지 나와 기자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이 여사는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무장투쟁 단체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던 약산 김원봉 선생 비서 이달(1907~1942) 선생의 딸이다. 재개발로 철거될 뻔한 충칭 임정 청사를 지켜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90년 임정 청사가 들어선 충칭 위중구 롄화츠(蓮花池) 38호 주변에 재개발이 시작됐다. 임정 청사도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이 여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당시 충칭에 나와 있던 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을 찾아 한국 외교부에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외교부는 중국 측에 충칭 임정 청사를 보존해줄 것을 요청했다. 충칭시 인민대표였던 이 여사도 관료들과의 연줄을 동원해 청사를 철거하지 말아 달라고 청원했다.
결국 임정 청사는 철거를 코앞에 두고 재개발 사업이 중단돼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임정 청사는 이후 복원을 시작해 95년 공식 개관했다. 이 여사는 92년부터는 충칭의 독립운동 유적을 찾아 헤매다 광복군총사령부 터를 찾아내 복원의 시초를 마련했다.
이달 선생은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에서 유학하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요인 암살 등을 도모하고, 조선의용대에도 입대했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으로 편입되자 김원봉의 비서로 일하다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여사는 “중국인 의사였던 어머니는 요인 암살 작전 중 부상을 입은 아버지를 치료하다 사랑에 빠져 조선인이라는 것도 모른 채 결혼했다”고 말했다. 11살 때 어머니까지 여의고 문화대혁명 때는 아버지 이력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복권이 됐다. 30년 넘게 의사로 일하다 충칭시 난안구 제1인민병원 원장까지 지냈다.
이 여사는 92년 한국 정부가 아버지 이달 선생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중국에서 ‘백범일지’를 처음 번역해 출간하는 등 임시정부 유적과 기록을 되살리는 데 헌신하고 있다.
이 여사는 4살 무렵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뜻을 기리며 중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2005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 여사는 “내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며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중국에 살려니 불편한 게 많지만 조국을 위해 여생을 보내는 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충칭=글·사진 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1990년 임정 청사 터 재개발 얘기 듣고 韓 외교부에 알려”
입력 2019-01-20 2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