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요나단입니다. 다윗에게 많은 조력자와 은인이 있었지만 요나단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라며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 죽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그 후 사울왕에게 나아가고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을 만납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군 장관으로 삼을 만큼 인정하고 신뢰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부른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노랫말을 듣고 마음이 변합니다. 다윗을 자신의 적이요, 왕권을 위협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장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였습니다. 요나단이 왕권에 대한 욕심을 가졌다면 다윗의 목숨을 노렸을 것입니다. 다윗을 아버지의 손에서 피하도록 돕기는커녕 계략을 꾸며 다윗을 잡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마음은 다윗과 하나 됐습니다.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변하지 않고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가문을 버렸고 아버지도 떠났습니다. 오직 다윗 한 사람만 선택했습니다.
요나단도 사람인데 어찌 세상 부귀영화에 마음이 가지 않겠습니까. 어찌 왕의 자리를 쉽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다윗을 죽이고 자신이 잘돼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피신을 돕고 다윗이 왕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님은 두 개의 문을 말씀하십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대신 가문을 선택해 그 문으로 갑니다. 또는 재물을 선택합니다. 세상의 안위를 선택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버립니다. 말씀을 버립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습니다. 찾는 자는 적지만 분명히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 자도 있습니다. 바로 요나단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윗과 하나 돼 끝까지 사랑한 요나단의 마음이 주 예수님을 향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돼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 돼야 합니다. 주님을 제쳐놓고 부귀와 영광, 권세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적 마음과 하나 되지 맙시다. 이사야 42장 8절은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고, 높아지시고, 인정받으시는 것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이지 아니하는 사람은 주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왕이 돼야 할 분은 주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1~22)라고 선포합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뿐입니다. 만물은 예수님 발아래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님도, 장로님도, 권사님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자 왕이 되셔서 통치하시며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돼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감동 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병환 사관 (구세군북대구교회)
[오늘의 설교] 누구와 무엇과 하나 될 것인가
입력 2019-01-21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