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걸 원망하는 난민 소년… ‘가버나움’의 기적이란 [리뷰]

입력 2019-01-17 00:10
난민의 처참한 현실을 다룬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레바논 출신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연기 경험이 없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끌어내기 위해 6개월 동안 500시간이 넘는 촬영본을 만들었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인(오른쪽)과 한 살 배기 아기 요하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사람을 칼로 찔러 수감된 소년이 다시 법정에 선다. 이번에는 원고로서다. 소년은 말한다. “내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일말의 망설임이나 흔들림도 없다. 판사가 이유를 묻자, 사슴같이 맑디맑은 눈망울로 답한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토록 깊은 분노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영화 ‘가버나움’은 곧바로 소년의 삶 속으로 따라 들어간다. 소년의 이름은 자인(자인 알 라피아). 나이는 열두 살 정도로 추정되는데, 출생기록이 없어 정확히 모른다.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에 사는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일 뿐이다.

매일 어린 동생들을 줄줄이 달고 길거리에 나가 과일주스를 판다. 사실상 앵벌이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배달도 한다. 자기 몸집만한 물통을 나르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넘어져버릴 듯 위태위태하다.

고단함도 배고픔도 견딜 수 있다. 그쯤이야 익숙하다. 자인을 참을 수 없게 만든 건 한 살 터울 여동생의 결혼. 생리가 시작된 걸 부모가 알면 시집을 보내 버릴까봐 제 손으로 속옷까지 빨아 입히던 동생이 슈퍼마켓 주인에게 팔려가듯 결혼하자 자인은 집을 떠난다.

놀이공원 청소부로 일하는 불법체류자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을 만나면서 새로운 일상이 시작된다. 라힐의 집에 얹혀살며 그의 한 살배기 아들을 돌보기로 한다. 평화는 짧다. 어느 날 라힐이 단속에 걸려 돌아오지 않자, 덩그러니 남은 둘은 막막해진다.

카메라에 비친 그들의 삶은 지독히도 생생하다. 영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현실 그 자체로 보이는 것이다. 난민들의 실상을 담아내고자 한 나딘 라바키 감독의 의도가 철저히 반영된 결과다. 불필요한 연출이나 음악이 배제된 것도 그래서다.

캐스팅부터 남달랐다. 라바키 감독은 길거리 캐스팅으로 출연진을 꾸렸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을 실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연기했다. 동명의 주인공을 연기한 자인 알 라피아는 베이루트에 정착해 살던 시리아 난민이다.

상영시간 126분 동안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른다. 깊은 여운을 남기는 건 자인의 지친 뒷모습이다. 축 처진 어깨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그의 발걸음을 좇다 보면 형언할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든다. 생애 처음 연기라는 걸 해본 그는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흡인력을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 ‘가버나움’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기적을 행한 이스라엘의 도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자 예수는 멸망을 예언했고, 도시는 결국 퇴락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지옥에까지 내려갈 것이다.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은 오늘까지 남아 있었으리라.”(마태복음 11:23)

오늘날 ‘가버나움’은 혼돈과 기적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라바키 감독은 “모든 혼돈의 안갯속에서 작은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했다.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24일 개봉. 15세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