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불편한’ 얘기들이 오갔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끝까지 경청했다. 청와대와 정부 관료들은 기업의 쓴소리에 답을 내놓으려 애썼다. 사상 최대 규모로 이뤄진 문 대통령과 기업인들의 간담회에서 일부 논의는 헛바퀴를 돌았지만 규제 입증 책임제 등 성과를 낸 부분도 있었다. 민간 분야에 온기를 전하려 애쓴 정부와 규제 혁파를 강력히 요구한 기업인들 사이에서 비교적 원활한 소통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된다.
문 대통령은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대기업 총수와 중견기업인 등 128명과 함께 ‘2019 기업인과의 대화’ 행사를 가졌다. 간담회 초반부터 ‘즉석 합의’가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 중견기업위원장인 이종태 퍼시스 회장은 세 번째 질의에서 정부의 과다한 규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이 회장은 “기업이 규제를 왜 풀어야 하는지 호소하고 입증하는 현재 방식보다 공무원이 규제를 왜 유지해야 하는지 입증하되 입증에 실패하면 규제를 폐지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전규제 일괄 정비를 위해 공직사회에 입증 책임을 둬야 한다는 뜻이다. 이 회장은 과거 교육부가 입증 책임을 공무원에게 부과하면서 규제 5332건 중 2639건이 폐지됐다며 구체적인 수치도 거론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라며 “지난해 지방자치단체 행정조사와 관련해 유사한 기준을 적용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홍 부총리는 650건의 행정조사를 전수조사해 상당 부분을 철폐했다면서 “국정 전반에 걸쳐 할 수는 없지만 공직자가 입증을 못하면 과감하게 없애는 시도를 하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도 “법률 개정이 필요한 부분은 입법절차상 시간이 걸리겠지만 행정명령으로 인한 규제는 정부가 선도적으로 노력해나갈 수 있다”며 홍 부총리에게 “집중적으로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입법절차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정부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졌다. 황창규 KT 회장은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200여명의 사상자가 나온 것과 달리 지난해 메르스가 발생했을 때는 KT의 로밍데이터 분석을 통한 추적 관찰로 사망자가 없었다고 강조하면서 “개인정보 보호 규제가 너무 많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개인정보 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보호법)은 지난해 11월 정부·여당이 개정안을 발의해 국회에 계류 중”이라며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하고 나면 (규제 혁신이) 굉장히 가속화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남다른 각오를 내비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삼성전자의) 수출 실적이 부진해 국민들에게 걱정을 드린 점 송구하다”며 “국제정치의 불확실성이나 시장 축소는 핑계이며, 그럴 때일수록 하강 사이클에 대비해야 하는 게 기업의 임무”라고 말했다. 이어 두 아이의 아버지임을 언급하며 “대한민국 1등 대기업으로서 지난해 숙제라고 밝힌 ‘일자리 3년간 4만명’도 꼭 지키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행사 종료 후 4대 기업 총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과 함께 25분간 청와대 경내를 산책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공무원이 규제 입증 실패 땐 과감한 철폐 ‘즉석 합의’
입력 2019-01-16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