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활 건 현실에 낭만적 고교학점제… 머나먼 참교육

입력 2019-01-16 04:05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신년사 등에서 “고교학점제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던 학점제 도입 문제가 다시 이목을 끌고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국민일보DB
학생들이 고교 수업을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실력을 기르는 기회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학교는 어떻게 바뀔까. “알아듣지 못하겠거든 수업 분위기 망치지 말고 자라”고 말하는 교사도, 이런 소리조차 무시하고 엎드려 자는 학생도 찾기 어려워질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표 교육 공약이자 국정과제인 고교학점제는 이런 발상에서 출발했다. 제도가 안착하면 학생들은 국어 수학 영어 위주로 짜인 획일화된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진로와 적성 혹은 능력과 흥미에 맞춰 수업을 골라 듣게 된다. 그러나 고교학점제에는 낭만적이란 평가가 따라붙는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오는지 짚어봤다.

교육부 로드맵을 보면 학점제는 올해 초등학교 4학년으로 올라가는 학생이 고등학교에 가는 2025년에 전면 도입된다(그래픽 참조). 당초 문재인정부 마지막 해인 2022년 전면 도입 예정이었는데 3년 미뤄졌다. 2022년 3월 대선에서 승리할 집권세력에 결정을 넘긴 것이다. 이 때문에 문재인정부가 학점제를 사실상 포기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7일 “학점제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다음날 성기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도 신년사에서 “올해 학점제 도입을 위해 적극 연구한다”고 말해 수면 위로 다시 올라왔다.

교육부 실무진은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 학점제 연구학교를 342개교(지난해 105개교)로 늘릴 계획이다. 또한 고1을 대상으로 진로선택과목에 한정해 성취평가제(내신 절대평가)를 도입한다. 2022년에는 학점제용 교육과정을 완성한다. 국가 교육의 밑그림인 교육과정을 개편하려면 2~3년이 소요되므로 늦어도 내년쯤엔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최하영 고교학사제도혁신팀장은 15일 “학점제는 꼭 가야 할 길이란 공감대가 있다. (결정은 차기 정부 몫이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을 차분히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학점제를 제대로 도입하려면 대입 개편을 피할 수 없다. 먼저 수능 제도를 보자. 지금처럼 상대평가이고 대입에서 영향력이 강력하다면 학점제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학점제의 핵심은 학생의 과목 선택권 보장이다.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자유롭게 수업을 듣고 이를 성적에 반영해야 한다. 지금처럼 수능이 수시에서 최저학력기준으로 활용되고 정시 비율이 30~40%로 못 박혀 있다면 학점제가 도입되더라도 수능 과목 위주로 교육과정을 편성할 수밖에 없어진다. 대입이란 지상 목표 아래 학생과 학부모, 고교가 뜻을 모을 것이다. 문·이과 통합을 시도했던 2015 개정 교육과정도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강조했지만 과목 이기주의와 수능의 힘을 빼는 데 실패하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일부 과목에서 낙제를 받기라도 하면 수능에 ‘올인’하려고 학교를 관두는 게 합리적 선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교육 당국은 학점제 도입에 앞서 수능을 절대평가로 전환해 자격고사화하거나 정시 비율을 대폭 낮추거나 수시 최저학력기준 제도 자체를 없애는 등 수능의 힘을 빼는 방법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2017~2018년 대입제도 개편을 보면 녹록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어렵지 않게 나온다. 최근에는 숙명여고 사태로 불거진 내신 불신 풍조가 학생부종합전형 불신과 맞물려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어 ‘수능=공정’이란 프레임이 더 강력해지고 있다. 수능이 뒤늦게 정신 차리고 공부하려는 학생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수능의 힘을 빼기 어려운 부분이다.

고교 내신을 절대평가로 전환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학점제와 상대평가는 양립하기 어렵다. 진로나 적성보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과목을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학점제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절대평가로 전환했을 때는 내신 부풀리기 근절이 관건이다. 고입 사교육 증가도 우려되는 요소다. 많은 학생과 학부모는 고교를 선택할 때 대학 진학의 유불리를 최우선 고려 요소로 삼고 있다. 특수목적고나 자율형사립고 혹은 진학 실적이 좋은 일반고에 진학할 때 주저하게 하는 요소는 내신 성적을 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고교 내신이 절대평가로 전환되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에 진학하더라도 이런 걱정을 할 이유가 줄어든다. 반면 사교육은 중학교나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팽창하게 되고 학생과 학부모 모두 고통을 받을 수 있다. ‘특목고-자사고-일반고’ 서열 체제에서 섣불리 절대평가로 전환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명박·박근혜정부가 수차례 도입을 시도했다가 미뤘던 이유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어떤 과목을 얼마나 가르칠지는 ‘밥그릇’과 연결돼 있다. 교육부는 이 밥그릇을 줄이기 어렵다. 학생 선택권을 강조한 2015 개정 교육과정을 만들 때도 그랬다. 당시 교육부는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사회 등 주요 과목의 필수 이수단위(국가가 필수적으로 가르치도록 규정한 수업시간)를 줄이려 했었다. 그러자 해당 과목 교사는 물론 사범대 교수와 학회가 일제히 반발했다. 일부 과목 이해관계자들은 청와대에 온갖 루트를 통해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교육부가 백기를 들었다. 고교에서 수업시간이 줄면 필요한 교사 수도 줄어든다. 교사를 가르치는 교수의 입지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어 이들은 똘똘 뭉쳐 수업시간을 지키려 한다. 당시 교육부 관계자는 “도저히 버티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학점제형 공간을 확보하는 문제도 녹록지 않다. 대학 강의실처럼 다양한 공간이 확보돼야 하는데 대다수 고교는 준비가 돼 있지 않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한 학생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유능한 교사를 더 확보해야 한다. 지역별·학교별 격차 해소 문제도 숙제다. 강사를 구하기 쉬운 대도시 고교에서는 수업이 마련돼 있지만 농어촌 학교에는 없거나 온라인으로 들어야 한다면 형평성 논란은 불가피해진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