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의 당신과 함께한 한 컷] 고통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

입력 2019-01-18 18:01
레바논 베이루트의 빈민가에 사는 주인공 ‘자인’(앞줄 오른쪽)과 친구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성현(현 필름포럼 대표·창조의정원교회 담임목사)
1월은 희망을 이야기하기 좋은 달이다. 새로운 해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영화 ‘가버나움’은 1월에 보기엔 적합하지 않다. 희망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슬픈 눈을 가진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의 비참한 삶을 천천히 따라간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빈민가에서 극빈의 삶을 사는 자인과 그의 가족들에게 삶은 생존한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극렬히 저항했지만 여동생은 초경을 시작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다른 집의 신부로 팔려간다. 지옥 같은 삶을 견디다 못해 달아나지만 또 다른 지옥을 만난다. 부모의 자리를 메워 줄 어른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부모 역할을 감당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무책임하다고 여겼던 부모와 다르게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무정한 어른들 틈에서 자신조차 무책임한 일을 벌이고 만다. 삶이 형벌처럼 느껴질 정도다. 마침내 자인은 방송을 통해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다. 부모를 고소하는 이유에 관해 묻자 단호하게 대답한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나딘 라바키 감독은 자인이 실제로 겪은 일들을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혔다. 실화에 가깝다는 걸 모르는 관객들조차 영화를 보는 내내 아주 고통스럽고 심지어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외신이라는 이름으로 1~2분간 접한 고통의 정보를 2시간 6분의 드라마로 체험하게 된다.

안 그래도 힘든 세상에 굳이 영화관까지 오는 수고를 들여가며 고통을 관람할 필요가 있을까. 고통을 서둘러 대할 때 고통은 치유되지 않고 처리되기 때문이다. 엄기호 사회학자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과 함께 걷기를 권한다. 고통을 당한 이와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하면 ‘지금 당장’의 조급함에 쫓긴다. 고통당한 이도 빠른 응답을 원하고 듣는 이도 곧바로 응답하는 것이 고통당하는 상대에 대해 윤리적인 것처럼 된다. 당장의 고통이 사람을 ‘지금 당장’에 묶어놓고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두 사람만 존재하는 급박함에서 벗어나게 되면, 두 사람 너머의 바깥 세계가 공존하기 때문에 훨씬 여유롭고 창의적으로 응답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우리의 언어는 선악으로 나누는 동원의 언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입체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동행’의 언어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자인의 부모가 법정에서 자신들의 삶을 변호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인의 어머니는 말한다. “죽을 힘을 다해 사는 데 이렇게 비난하나요. 나처럼 살아봤어요? 그런 적도 그럴 일도 없겠죠. 상상도 못 할 거잖아요.”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큰 무리를 보셨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셨다. 그날 그 빈들에 있던 이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가 아닌, 연민과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본 한 분의 시선에서 비롯되었다.(마 14:13~21) 보지 않고서는 마음이 생겨날 수 없는 법이다.

베이루트의 비참한 거리를 자인과 함께 걷다 보면, 누구와 어떻게 동행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서둘러 뭔가를 하려 하지 말고 그 얼굴이 내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고통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이쯤에서 정정해야겠다. 영화 ‘가버나움’은 1월에 보기에 적합한 영화다.

약력=장로회신학대학원(M.Div.) 실천신학대학원(Th.M.·예배학박사), 현 필름포럼 대표, 창조의정원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