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2·한국체대) 선수를 때린 데 이어 심지어 성폭행까지 자행했다는 의혹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는 조재범(38) 전 코치.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그가 폭행 건만으로도 구속돼 이미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14일 관리위원회를 열고, 조 전 코치에게 영구제명 징계를 내렸다. 지난해 1월 진천선수촌에서 심 선수를 폭행한 사실이 밝혀진 뒤 무려 1년이 지난 것이다.
빙상연맹은 또 후속조치로 국제빙상경기연맹에 폭력 및 성폭력 징계자의 해외 취업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건의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는 체육당국이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부분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주 심 선수 사태가 불거진 뒤 가진 긴급 기자회견에서 “가해자를 체육계에서 영구 추방하고, 국내뿐 아니라 해외 진출까지 제한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전 유도선수 신유용(24)씨 사건도 마찬가지다. 신씨는 고교 1학년 때인 2011년 여름부터 고교 졸업 후인 2015년까지 유도부 A코치로부터 약 20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심지어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산부인과 진료를 강요 받았고, 지난해에는 A코치가 500만원을 주면서 자신을 회유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신씨는 지난해 3월 경찰에 A코치를 고소했고, 지난해 11월 페이스북을 통해 이를 공개했다.
그런데 대한유도회는 신씨 성폭행 사건을 파악한 후에도 해당 코치에 대한 징계를 전혀 하지 않았다. 14일 오전에도 유도회는 “검찰 조사 결과가 나온 뒤 해당 코치에 관한 징계 수준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결국 사건이 일파만파 확대된 오후에 부랴부랴 보도자료를 내고 “또 다른 유사 피해가 발생되지 않도록 19일 이사회를 열고 해당자에 대한 영구제명 및 삭단(유도 단 급을 삭제하는 행위) 조치를 긴급 처리할 계획”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렇듯 체육계는 폭력·성폭력에 대해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대책이라고 해봤자 이미 전에 나온 것을 짜깁기한 것에 불과할 뿐 아니라 실효성도 없는 ‘맹탕’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심 선수 성폭행 파문 이후 체육계에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확산되자 문재인 대통령도 나섰다.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체육계 폭력과 성폭력 문제를 철저히 조사해 엄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최근 연이은 체육계 폭력, 성폭력 증언은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의 화려한 모습 속에 감춰져 왔던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라며 “외형의 성장을 따르지 못한 우리 내면의 후진성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체육은 자아실현과 자기 성장의 길이어야 하고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며 “성적 향상을 위해 또는 국제대회의 메달을 이유로 가해지는 어떤 억압과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체육계의 성적 지상주의, 엘리트 체육 위주의 육성 방식에 대해서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개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체육계를 향해 “과거 자신들이 선수 시절 받았던 도제식의 억압적 훈련방식을 대물림한 측면이 없는지 되돌아보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쇄신책을 내놔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모든 피해자가 자신과 후배,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용기 있게 피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모규엽 박세환 기자 hirte@kmib.co.kr
짜깁기·재탕·뒷북 일관하는 체육계, 문 대통령 “철저 조사 엄벌”
입력 2019-01-14 19:13 수정 2019-01-14 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