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 의약품 4종 허용됐지만 웃지 못하는 환자·가족들

입력 2019-01-15 04:02
한국의료용대마합법화운동본부 대표인 강성석(오른쪽) 목사가 지난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의료용 대마 처방 확대 및 절차 간소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개정된 마약류관리법의 수정·보완을 요구하는 문구가 적힌 팻말들.
희귀병 환자들 CBD오일 사용 못해… 사용 범위 너무 제한 현실성 떨어져
희귀의약품센터서만 공급도 문제… 식약처 “CBD 사용 사회적 합의 필요”


소아 뇌전증(간질)의 하나인 ‘레녹스가스토증후군’을 앓는 아들(8)이 있는 의사 황주연(45)씨는 요즘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난치성 뇌전증에 효과적인 대마 성분을 아이 치료에 사용할 수 있게 마약류관리법이 바뀌었지만 필요할 때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황씨는 2017년 대마 성분인 ‘카나비디올(CBD)오일’을 미국에서 두차례 국내 반입했다가 마약사범으로 몰려 검찰수사를 받는 등 시련을 겪었다(국민일보 2018년 9월 4일자 보도). 그때까지만 해도 마약류관리법상 대마초의 씨앗과 뿌리·줄기를 제외한 부위(꽃·잎)와 그로부터 뽑은 성분은 섭취 및 흡입이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이에 황씨는 같은 처지의 환자 가족, 시민단체와 함께 의료용 대마 합법화 운동을 벌였고 지난해 11월 결국 대마 단속 48년만에 법개정을 이끌어냈다. 마약류관리법 3조7항(일반 행위 금지)에서 ‘의료 목적 사용’이 예외 사항으로 추가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달 14일 법개정에 따른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마련했다. 문제는 여기서 불거졌다. 식약처가 모법의 취지와 달리 하부 법령에서 의료 목적 사용의 범위를 너무 제한해 실제 희귀난치병 환자 치료에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식약처는 미국과 유럽 등에서 허가돼 판매되는 대마 성분 의약품 4종만 자가(自家)치료용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의약품으로 승인받지 않은 식품, 즉 환자 가족들이 불법을 감수하고라도 해외에서 구입해 쓰려했던 CBD오일, 대마 추출물 등은 지금처럼 수입과 사용을 할 수 없다.

의료용 대마가 합법화된 미국(일부 주)과 캐나다 일본 중국 등에선 CBD오일이 건강보조식품으로 분류돼 영양제처럼 인터넷사이트에서도 쉽게 살 수 있다. 대마초의 80여가지 성분 중 하나인 CBD는 중독이나 환각 효과는 잘 유발되지 않는 걸로 알려져 마약류로 거의 분류되지 않는다. 지난해 초 열린 평창동계올림픽의 도핑 검사 항목에서도 빠졌다.

품목 규제에 대한 불만도 쏟아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의료용 대마가 뇌전증을 비롯한 18개 질환 치료에 효과적이며 중독 위험이 없다는 보고서를 냈다. 18개 질병에는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불안, 우울, 암 등도 포함됐다.

그런데 식약처가 사용 가능하다고 밝힌 4종의 대마 의약품은 식욕부진 에이즈 환자 및 항암 환자의 구토·구역질 방지용 진토제 2종, 다발성경화증의 항경련 치료제 1종, 소아 뇌전증(드라벳증후군·레녹스가스토증후군)치료제 1종이다. 즉 이들 외 다른 질환에는 대마 성분을 의료 목적이라도 쓸 수 없는 것이다.

한 파킨슨병 환자는 온라인커뮤니티에서 “대마 성분 의약품 수입이 가능해졌으나 파킨슨 환자들에게는 무용지물”이라며 “외국에서 허가받은 4종 외에는 사실상 모두 막겠다는 것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의료용 대마 합법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황주연씨는 또 “허가받은 약(에피디올렉스)이 있는 드라벳증후군이나 레녹스가스토증후군 외에도 소아 뇌전증의 종류가 많다”면서 “‘영아 연축’ 등 다른 뇌전증에는 대마 성분 약을 쓸 수 없는지 불안해 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의료용대마합법화운동본부 대표인 강성석 목사는 최근 열린 기자회견에서 “소아 뇌전증 약인 에피디올렉스도 CBD성분으로 만들었다. 사실 이것과 CBD오일은 큰 차이가 없는데, 왜 CBD오일은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다른 문제는 허용된 대마 의약품 4종마저 전국에 하나 뿐인 한국희귀의약품센터를 통해서만 수입·공급이 이뤄지도록 한다는 점이다. 환자들은 서울 강남구에 있는 센터를 직접 방문하거나 우편·온라인을 통해 신청하고 심사를 거친 후 공급받을 수 있다. 신청시 작성해야 할 서류는 의사 소견서 등 최소 12가지나 돼 신청 절차가 복잡하고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점을 환자와 가족들은 우려하고 있다.

강 목사는 “의약품 신청 후 심사를 거쳐 수입과 공급이 되기까지는 두달 가까이 걸린다.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와 가족들에겐 고통일 수 밖에 없다”면서 “법이 바뀌었지만 환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다”고 말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CBD오일에 환각·중독 작용이 거의 없다 하더라도 오남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과학적 근거 하에 만들어진 의약품만 쓰도록 한 것”이라며 “CBD오일 사용 확대 등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식약처는 아울러 희귀의약품센터 인력보완 등을 통해 1~2주 안에 대마 의약품의 수입·공급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지만 환자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희귀의약품센터를 통하면 비용을 전액 본인이 내야 해 경제적 부담도 만만찮다. ‘에피디올렉스’의 경우 연간 약 3600만원의 수입 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의료진이 해당 내용을 잘 몰라 처방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우려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제껏 대마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의대 수업과정에서도 깊이 다뤄지지 않았고 의료용 대마의 효과 연구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강 목사는 “오는 3월 12일부터 법 시행인데 초창기 혼란이 예상된다”면서 “난치병 환자들의 원활한 치료를 위해 보다 폭넓은 의료용 대마 사용과 절차 간소화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대한뇌전증학회 홍승봉(삼성서울병원 교수) 회장은 “다음달 쯤 뇌전증 치료에서의 대마 의약품의 처방 가이드라인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질환 분야 의료계에선 아무런 지침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환자들의 접근성을 보다 높이려면 해당 의약품을 원료 및 완제품 형태로 수입하고 제조·판매할 국내 제약사가 하루 빨리 나서 정식 허가를 받고 의료기관에 직접 공급하는 루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자들이 필요시 병원에서 의사 처방을 받고 즉시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 수요나 수익성 등 측면에서 선뜻 대마 의약품 수급에 나서는 제약사는 아직 없다.

글·사진=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