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권준수] 고 임세원 교수를 보내며

입력 2019-01-08 04:02

새해의 설렘이 충만하던 12월 마지막 날, 환자가 휘두른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난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의 비보가 아직도 온전한 현실로 믿기지 않는다. 그날 진료실에 왔던 마지막 환자가 칼을 꺼내 들자 임 교수는 급히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그 자리에서 혼자 도망을 칠 수도 있었건만 다급한 순간에도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태를 알리고 피신했는지 살피느라 애썼다고 한다. 길게 늘어선 추모의 물결은 고인이 보여준 순수했던 삶과 죽음 직전의 의연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제는 슬픔을 잠시 뒤로 하고 비극적 사건 이후 남겨진 현실을 돌아보려 한다. 사건이 벌어진 병원이라는 공간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오는 곳이다. 삶의 위기 순간에 환자라는 이름으로 진료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취약하고 불안한 상태다. 그렇기에 병원은 그들이 마음 놓고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신체적, 심리적인 안전지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특히 정신건강의학과는 이런 부분에 있어 더욱 취약하다. 외래는 물론이고 급성기 환자를 치료하는 보호병동은 항상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조현병이나 양극성장애는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폭력 위험성이 결코 높지 않다는 것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진 바 있다. 결국 근본 대책은 이런 환자들이 제때에 적절히 치료받을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거나, 반의사불벌죄 폐지 등의 사후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먼저 응급상황에 대한 대응 체계 구축이 중요하다. 응급정신의료체계는 현재 보건복지부, 경찰청, 의료계가 합심하여 제도를 구축 중인데, 조속히 마무리되어야 한다. 치료받지 못한 정신과 환자들이 문제행동으로 주변에 피해를 끼치거나 경찰에 신고되는 경우가 간혹 있으나, 현재의 제도적, 행정적 상황에서 이들을 의료기관까지 연계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피의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폭력성 때문에 멀리 떨어져 살았다고 한다. 피의자의 폭력성이 나타난 시기에 국가기관이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면 이번 일과 같은 참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타해 위험성이 있는 환자에 대해 적절히 치료할 수 있는 종합병원과 상급의료기관의 의료진과 격리병동 등 응급진료를 제공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하지만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대학병원조차 정신과 보호병동을 없애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에 대한 법제화와 재정적 지원이 시급하다.

지역사회치료명령, 외래치료명령 등 지역사회 기반 의무치료제도 활성화를 위한 사법적, 행정적 책임이 대폭 강화되어야 한다. 정신질환의 특성상 재발에 따른 급성기 관리가 중요하지만, 현재의 정신보건 행정체계는 이에 대한 대처방안이 부족하다. 현재 복지부에서 시행하는 병원기반사례관리 시범사업이 성공한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재발방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신건강복지법의 개정으로 입원이 어려워진 환자들을 관리할 지역사회의 인프라가 아직도 많이 부족한 편이다. 정신건강복지센터 인력을 대폭 증원하고 경찰 및 사법기관과의 공식 협력체계 구축이 법제화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호자동의에 의한 강제입원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강제 치료 및 이후의 심리적 타격, 이로 인한 다양한 위험성이 치료진과 보호자에게 전가되는 상황은 종식되어야 한다. 자·타해 위험으로 인한 강제입원은 사법 입원 형태로 국가공권력의 책임 하에 이루어지도록 정신건강복지법의 개정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소위 사법치료명령제라는 큰 틀에서 치료가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정신질환 급성재발로 인한 위험이 민간의료기관과 보호자들에게 전가되는 ‘위험의 외주화’는 중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정신과 환자들이 마음 놓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져 조기에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이유로 각종 불이익이 존재하는 현실에서는 정신과 방문을 꺼리게 될 것이고, 결국 조기 치료가 어려워지고, 병이 악화된 이후에야 치료를 받게 된다.

임 교수의 유족들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안전한 진료 환경을 만들고 정신과 환자들이 사회적 낙인 없이 편히 치료받을 환경을 조성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 평소 환자를 먼저 생각했던 고인의 삶과 그에 못지않은 유족들의 의연함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이제는 우리 사회와 정부가 응답할 차례이다.

권준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