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4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백범 김구 선생도 항일독립운동의 거두로 떠올랐다. 반면 일제의 감시와 추적도 심해졌다. 임시정부는 곧바로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옮겨가야 했다. 항저우·자싱~진장~창사~광저우~류저우에 이어 치장과 충칭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피난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백범은 매헌의 의거가 성공하자 미국인 조지 피치 목사 부부에게 피신처를 부탁했다. YMCA 간사였던 피치 목사는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자신의 집 2층을 내줬다. 피치 부인은 식사까지 정성껏 챙겨줬다. 백범은 이곳에서 김철,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20일가량 숨어 지냈다. 어느 날 수상한 사람을 발견한 피치 부인의 기지로 백범은 차를 타고 가까스로 피신한다.
프랑스 조계지를 떠난 백범은 곧바로 저장성 자싱(嘉興)으로 가 수륜사창으로 피신했다. 남파 박찬익 선생이 중국인 주푸청에게 부탁해 마련한 곳이다. 수륜사창은 주푸청의 아들인 주펑장이 경영하던 면사공장이었다. 엄항섭과 김의한, 이동녕 선생도 합류했다.
주푸청은 신해혁명의 원로로 덕망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린 백범을 보호해줬다. 주푸청은 수양아들 천둥성(陳桐生)의 별채인 매만가 76호에 백범의 거처를 마련해줬다. 백범은 비상구가 마련된 2층 안채에 머물면서 중국인 ‘장진구’로 행세했다.
기자가 지난달 25일 찾은 매만가에는 저보성기념관과 나란히 ‘김구 피난처’가 잘 보존돼 있었다. 2층 침실에서 바닥의 판자를 하나 걷어내니 곧바로 1층 통로로 내려가 배를 타고 남호(南湖)로 도피할 수 있게 돼 있었다. 2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동녕과 김의한, 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1층 사무실, 2층 숙소로 사용했던 일휘교 17호가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당시 백범의 목에는 천문학적인 현상금이 걸려 있어 따로 지냈다. 자싱에 진출한 효성그룹이 피난처 보존사업으로 그곳을 가꿨다.
자싱에도 일본 경찰들이 파견되면서 안전하지 못했다. 주푸청은 백범에게 아들 주펑장의 처가가 있는 하이옌의 재청별서(載靑別墅)에 은신하도록 했다. 주펑장의 처 주자루이(朱佳蘂)가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한 몸으로 백범을 안내했다.
재청별서는 피서를 위해 지은 별장으로, 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여 천혜의 은신처였다. 백범은 하이옌에서 매일 산에 오르고, 물구경 하고, 인근 민가에 묵으며 오랜만의 자유를 즐겼다. 그러나 그곳 역시 중국 경찰에 노출되자 자싱으로 돌아왔다.
백범은 자싱에서 처녀 뱃사공(船娘) 주아이바오(朱愛寶)와 나룻배 위에서 지냈다. 주펑장은 백범이 중국어가 서툴러 군관에게 체포되는 등 자주 위험에 노출되자 중학교 교원을 하는 중국인 과부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그러나 백범은 차라리 주씨 같은 일자무식이 더 안전하다며 그에게 의지했다. 백범은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운하에서 잤다”고 당시 불안했던 생활을 회고했다.
그 당시에도 임시정부는 분열에 시달렸다. 1935년 7월 5당을 통합해 조선민족혁명당을 출범시켰지만 다시 한 번 와해 직전에 몰렸다. 그해 11월 김구 이동녕 엄항섭 박찬익 등이 남호에 나룻배를 띄우고 선상회의를 열어 무정부 상태를 넘겼다.
그 시절 백범은 박찬익의 주선으로 장제스(蔣介石)와도 인연을 맺었다. 백범은 1933년 5월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특무공작 자금을 요청했다. 며칠 후 중국의 천궈푸가 백범에게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겠느냐”며 독립을 위한 군인 양성을 제안했다. 뤄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이 생기게 됐다. 중국 각지에서 청년들을 소집해 1934년 2월 92명을 1차로 입교시켰다. 대전자령 전투의 영웅 이청천(지청천)과 청산리전투의 주역 이범석이 교관으로 활동했다. 한인특별반은 1년 후 62명을 배출했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폐쇄됐다. 하지만 이들은 광복군의 핵심 자원이 됐다.
항저우에는 임시정부 유적들이 온전히 보전돼 있었다. 항저우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는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고, 10분 거리에 한국독립당이 진광을 만들었던 사염방 40호, 임정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오복리 주택가 등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임시정부가 항저우에 처음 판공처를 마련했던 청태제2여관(군영호텔)도 한정호텔이란 이름으로 영업 중이었다.
1935년 11월 임정 청사는 난징 근처인 전장(鎭江)으로 옮겨갔다. 백범 등 임정 요인들은 그러나 난징에도 일제가 암살대를 파견하자 자싱에 있던 주아이바오를 다시 불렀다. 난징을 떠날 때 백범은 5년간 함께했던 주아이바오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여비로 100원밖에 주지 못한 일을 가슴아파했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난징도 위험해졌다. 중국 정부는 충칭을 전시 수도로 정하고 각 기관을 하나씩 옮겨갔다. 임시정부도 그해 11월 후난성 창사에 둥지를 틀었다. 백범은 장사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조선혁명당 당부인 남목청에 모여 연회를 열고 있는데 이운환이 권총을 난사해 현익철이 죽고 유동렬 이청천이 부상을 입었다. 백범은 가슴에 총탄을 맞았다. 의사는 백범을 포기했다가 계속 숨이 붙어있자 수술을 했다. 창사도 위험해지자 백범은 절뚝거리는 다리로 다시 광저우로 피난을 떠났다.
항저우·자싱=글·사진 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항일운동 거두로 우뚝 선 백범, 고단했던 피난생활 “오늘은 남문 밖, 내일은 북문 밖…”
입력 2019-01-08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