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이 지난해 11월 잠적해 미국 망명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진 조성길 전 주이탈리아 북한대사대리 문제에 입을 닫고 있다. 새해 들어 속도를 내고 있는 2차 북·미 정상회담 준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로키(low-key)로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단 향후 북·미 관계에 따라선 이 문제가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5일(현지시간) 조 전 대사대리가 미국 망명을 원하고 있다는 이탈리아 현지 언론 보도에 대해 “망명 문제는 국무부 소관”이라고 밝혔다. 미 국무부는 “신변 안전과 국가 안보에 필수적인 사안에 대해선 언론과의 소통을 제한하는 내부 지침에 따라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 북한 관영 매체들도 조 전 대사대리의 이탈리아 공관 이탈과 잠적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띄우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망명 건이 정상회담 방해 요인이 되지 않도록 관리할 것”이라며 “당분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통상 망명은 했는지조차 모르게끔 끝나거나 망명 절차가 완료된 이후 신변이 노출되는 경우가 있다”며 “조 전 대사대리의 의도와 행보가 명확히 확인될 때까지 북한도 함구할 것”이라고 했다. 북·미 모두 현 시점에서 비핵화 협상과 조 전 대사대리 문제를 분리 대응할 것이란 의미다. 앞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3일 “아직 끝내야 할 많은 일들이 남아 있지만 나는 짧은 시간 안에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미 교착이 길어지면 망명 문제가 민감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미국에선 이미 조 전 대사대리의 잠적을 북한의 인권 탄압과 연결짓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 인터뷰에서 “서방 국가에서 자유로운 정보 접근과 여행을 경험한 북한 외교관이 본국의 귀환 명령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북한 외교관 잠적 사례는 북한이 노동자들의 천국이라는 북한 정권 주장이 거짓말임을 확인해주고 있다”고 했다.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이 북핵과 북한 인권을 연계해 트럼프 행정부를 압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탈리아의 유력 일간지 라레푸블리카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미 정부가 이탈리아 정보 당국에 조 전 대사대리 잠적 사실을 비밀에 부쳐 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사건은 지난 1년간 전례 없는 외교적 노력으로 합법적 정상의 위상을 다지려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굴욕적인 일격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가운데 2016년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공사는 조 전 대사대리를 향해 “대한민국으로 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며 한국행을 촉구했다.
태 전 공사는 블로그에 ‘나의 친구 조성길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올려 “서울에서 나와 의기투합해 북한의 기득권층을 무너뜨리고 이 나라를 통일하자”고 했다. 그는 조 전 대사대리가 자녀 교육 문제로 망명을 원하고 있다는 관측을 염두에 둔 듯 “자녀 교육도 한국이 좋다”며 “우리 온 가족이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권지혜 이상헌 기자,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hk@kmib.co.kr
2차 정상회담 앞두고 ‘조성길 시한폭탄’ 떠안은 북·미
입력 2019-01-07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