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KT&G 인사 개입 의혹 등을 폭로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유서를 남긴 채 잠적했다가 경찰 수색 4시간여 만에 발견됐다. 유서를 살펴본 전문가들은 그가 사명감으로 비리를 폭로했지만 정부와 여권이 고발과 폄훼로 대응하자 절망감을 느낀 듯하다고 분석했다.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는 절박감도 그를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갔다고 봤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3일 오전 신 전 사무관으로부터 마지막을 암시하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는 신고를 받고 수색에 나섰다. 그는 오후 12시40분쯤 관악구 봉천동의 한 모텔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발견 당시 신 전 사무관의 목에 극단적 행동을 시도한 흔적이 있어 응급치료를 했다. 의식이 명료하고 움직일 수 있는 등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말했다.
유서에는 폭로에 나서기까지 겪은 내적 갈등이 드러나 있다. 고려대 커뮤니티 게시판엔 신 전 사무관의 유서로 추정되는 ‘마지막 글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그는 “내가 폭로한 건 이걸 말하지 않으면 다른 것을 하지 못할 거라는 부채의식 때문이다. 퇴사하고 6개월간 술만 마시고 정말 폐인처럼 살았다”고 언급했다. 익명을 요구한 심리학과 A교수는 “신 전 사무관은 양심이 굉장히 강한 사람으로 보인다. ‘정의를 위해 나서야겠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의 성격 자체가 죄책감을 못 이겨 괴로워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신 전 사무관이 내적 갈등 끝에 부당함을 폭로했지만 정부가 강하게 반박하고 고발에 나서자 무만감(의욕 없음·hopelessness)에 빠진 것 같다고 봤다. 신 전 사무관의 글에는 “이번 정부라면 최소한 진지하게 들어주고 재발방지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며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사과하고 대응방지 약속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대목이 언급돼 있다.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모든 변호사가 변호를 맡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했다”라는 말도 있다. A교수는 “정부를 얘기해도 소용없는 단단한 벽으로 느낀 것으로 보인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절망감으로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지지했던 정권의 내부고발에 대한 대처가 이전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본인의 억울함을 대중이 알아줬으면 하는 욕구가 컸다는 분석도 있다. 신 전 사무관은 글에서 “진정성이 의심받는 게 싫다”고 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용기 내서 폭로를 했는데 일부 여론이 ‘관종’이라며 부정적으로 보자 억울했던 듯하다”고 말했다. 박종익 강원대 정신과 교수는 “친구에게 마지막을 암시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예약 전송한 점, 유서를 공개적인 인터넷 공간에 올린 점을 봤을 때 본인이 힘들고 억울한 것을 호소하고픈 욕구가 강하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내부고발자들은 보통 폭로 이후 자신이 겪을 풍파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 마련인데 신 전 사무관은 그 정도까지 마음 준비를 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청와대나 정부·여당의 대응이 예상보다 강경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A교수는 “전 상사 등 주변인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죄책감도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박 교수는 “마냥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랬을까’라고만 봐선 안 된다”며 “공인이 된 인물이 이런 일을 벌였을 때 대중은 학습효과가 있다. 극단적 선택이 억울함을 알리는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
신재민의 극단적 시도… 정부·여당의 폄훼, 절망감, 억울함 작용한 듯
입력 2019-01-04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