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도통 관심 없다는 아재들도 ‘남성 변기’를 뒤집어 놓고 미술작품이라고 내놓은 마르셀 뒤샹(1887~1968)은 안다. 미술사의 획을 그은 뒤샹의 ‘변기 사건’이 발생한 건 1917년.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현대미술사는 뒤샹의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생애와 예술을 보여주는 국내 첫 회고전 ‘마르셀 뒤샹’전이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개막 10일 만인 지난 31일 현재 서울관의 평소 관람객의 1.5배인 6만4000여명이 다녀가는 등 열기가 후끈하다.
전시는 뒤샹 작품의 최대 소장처인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공동 주최해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다. 회화, 드로잉, 설치 등 150여점이 나왔다.
어, 회화 작품도 많네
하이라이트는 역시 유리관 안에 아우라를 뿜으며 놓인 변기다. 뒤샹에 의해 미술이 된 그 변기 작품을 만나기까지 관객들은 ‘회화방’을 통과하도록 동선이 구성됐다. 미술사의 물줄기를 바꾼 ‘오브제의 발견’이 어느 날 튀어나온 게 아니라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탄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나고 자란 뒤샹은 파리로 유학 가 입체파 그룹에서 활동했다. 전시장엔 인상파 같은 풍경화, 세잔을 연상시키는 후기 인상주의식 작품도 보인다. 이어 입체파 향기가 물씬 나는 ‘소나타’(1911) 등의 작품이 연대기처럼 펼쳐진다. 악기를 연주하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그린 이 작품은 인체의 해체와 재편집이 입체파 창시자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1912년 작인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에서는 입체파와의 결별의 기운이 감지된다. 여성 누드를 움직이는 기계처럼 역동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을 두고 뒤샹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기계를 찬양했던 미래파에 가까운 이 작품을 입체파는 못마땅해 했지만, 1913년 뉴욕 전시에서 화제를 뿌리며 그를 미술계 스타로 키웠다.
‘미술 아닌 미술’
1912년, 뒤샹의 삶에 전기가 왔다. 파리에서 열린 파리항공살롱을 관람한 것이 25세 패기만만한 화가의 삶을 통째 흔들었다. 전시장에 나온 금속성의 항공기, 거대한 프로펠러의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그는 함께 관람했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회화는 이제 끝났어. 저 프로펠러보다 더 나은 것을 누가 만들 수 있겠어?”
그림과 조각의 관습을 계속 지킬 것인가, 판을 바꾸고 전통적 매체를 폐기할 것인가. 뒤샹은 후자의 길을 걸을 채비를 단단히 했다. 그리고 5년 뒤 뉴욕에서 변기를 내놓은 것이다. 그의 나이 30세 때다. 2년 전 뉴욕으로 건너온 그는 1917년 독립예술가협회 전시에 철물점에서 산 남성 소변기에 가상의 예술가 ‘R. Mutt’(Mutt는 변기 제조회사 이름)라는 서명을 하고는 ‘샘’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주최 측은 이 황당한 작품을 두고 투표를 벌였고, 그 결과 작품은 전시되지 못했다. 2년 뒤에야 인정을 받으며 다시 제작됐다. 이번 전시에 나온 변기 작품은 1950년에 재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변기 복제품 17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변기는 어떻게 미술이 됐나. 이른바 레디메이드(기성품)는 작가의 선택과 명명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이 모든 것은 질문의 힘이다. 회화와의 결별을 선언한 뒤샹은 집요하게 “‘미술’ 작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되뇌었다. 미술의 개념과 미술가의 역할에 대해 묻는 이 질문의 힘으로 1960년대 이후 개념미술과 설치미술 등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의 초기 레디메이드인 ‘자전거바퀴’(1913), ‘병걸이’(1914)도 나오는 등 문제작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천재는 쉬지 않는다
뒤샹의 또 다른 힘은 쉼 없는 변신이다. 34세 때부터는 미술에서 체스로 일을 바꾸겠다고 하더니 20여년간 체스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작가로서 1920년대에 ‘에로즈 셀라비’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내놓았다. 여성인 셀라비로 분한 자신의 모습을 동료 사진작가 만 레이가 찍은 작품들이다. 1926년에는 아방가르드 영화 ‘빈혈증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부턴 자신의 작품들을 미니어처 복제품 형태로 재현한 ‘여행가방 속 상자’도 만들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고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던 뒤샹은 작품이 분실되거나 훼손될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렸던 것이다.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작품의 전시와 소장, 복제 등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뒤샹은 멈추었을까. 사후 공개된 디오라마(입체모형) 형태의 작품 ‘에탕 도네’(1968)를 통해 천재는 안주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했다. 구멍 속으로 황폐한 풍경, 누워 있는 여성 누드가 보이는 이 작품은 입체도 평면도 아닌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20년 동안 남몰래 실험하며 소장자에게 자신의 사후에 공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실제 타계한 1년 뒤 필라델피아미술관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그는 끝까지 혁신가였다. 4월 7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yosohn@kmib.co.kr
‘미술의 틀 깰 수 없을까?’ 집요했던 뒤샹, 혁신 낳았다
입력 2019-01-03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