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영미] 정시 확대에 반대한다

입력 2018-12-27 04:00

아이가 교내 대회에 참가한다고 수선을 떤 게 몇 달 전이었다. 목표는 장려상. 최우수상은 ‘내신 어벤저스’ 몫이라고 했다. 문과 1등, 이과 1·2등이 꾸린 팀이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얼마 전에는 ‘폭망’했다던 아이의 수행평가 점수가 만점으로 나왔다. 쪽지시험처럼 수시로 치르는 수행평가는 채점 방식에 따라 점수가 춤을 춘다. 이상하게도 최상위권 학생들이 실수하면 채점 기준이 느슨해진다. 변별력을 낮추려는 건가. 의심은 가지만 확인한 적도 확인할 수도 없다. 오해할까봐 덧붙이는데 아이는 최상위권이 아니다.

아이가 다니는 일반고의 소위 명문대 합격자는 한 해 3~4명 수준이다. 그나마 재수생을 합친 숫자다. 재학생 통계를 물었을 때 당황한 교사 얼굴을 보고 세상 둔한 나조차 눈치 챘다. 몇 명 안 되는 합격자의 진짜 모교는 재수학원이었다. 그러니 1년에 고작 10여개 열리는 교내 대회에서 어벤저스를 탈락시키는 건 선택지가 아니다. 자원은 전교 5등 안쪽에 몰아줘야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혹은 대입 정시전형으로 바꿔도 무방하다)은 5지선다의 정답 찾기 게임이자, 한 번의 시험으로 학생을 줄 세우는 비인간적 경쟁으로 비판받아 왔다.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수시라고 별다르겠나. 수능 대신 내신 성적으로 줄선다는 것, 시험문제는 수능보다 더 답답하다는 것. 다른 건 그 정도다. 겪어보니 그렇다. 못 믿겠다면 내신 영어 문법 문제를 풀어보라. 원어민 영어학원을 섭렵한 요즘 아이들이 다다른 종착역이 어디인지 알게 된다.

나는 정시 확대에 반대한다. 그리고 정시 확대에 반대한다면서 지금 수시의 단점을 열렬하게 열거하는 중이다. 고교 교사들이 주장하듯 내신에 충실하면 경쟁과 줄서기가 사라지고 창의력이 샘솟는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믿어서, 수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 열쇠여서 내가 ‘정시 반대-수시 찬성’을 외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현재의 수시는 무한경쟁과 불공정의 조합처럼 보인다. 학생들에게는 고3이 아니라 고교 3년을 지옥으로 만드는 제도일 터이고. 그러니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시 확대에 반대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오직 수시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들이 있다고 믿어서다.

올해 아이는 ‘사피엔스’와 ‘햄릿’ ‘완벽에 대한 반론’ 같은 책들을 읽었다. 엄마 잔소리는 귓등으로 듣더니 생기부 세특(생활기록부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걱정에 먼저 책장을 넘겼다. 브렉시트를 주제로 보고서를 쓰고, 혐오 발언에 대해 ppt 자료를 만들었으며, 뮤지컬 대본을 썼다. 대부분은 팀으로 한 일이다. 보고서를 쓸 때는 분야를 나눠 자료를 찾고, 상호 조언을 하고, 이를 토대로 내용을 보완했다. 자율 동아리에서는 5~6명이 난수표 같은 학원 일정을 조정해 모임 날짜를 정하고 활동지를 만들었다. 다툼이 없을 리 없다. 자료를 보내기로 한 친구가 소식이 끊겨 새벽까지 잠을 설친 날도 있다. 그런 고생이 대단한 성과로 이어졌다는 게 아니다. 실은 너무 초라해서 아이는 자주 우울해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고맙다. 적어도 팀을 이룬 그 순간, 아이들은 서로에게 내신 경쟁자가 아니라 ‘네가 잘하면 나도 좋은’ 파트너가 됐을 것이다.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책 구경도 했다. 이게 다 버린 시간은 아니지 않나.

수시냐, 정시냐. 해답은 입시의 공정함이나 경쟁 해소 같은 잣대로는, 아니 그런 잣대만으로는 절대 찾을 수 없다. 어떻게 바꾸든 대학 문은 좁고 경쟁은 치열할 거다. 자원을 많이 가진 이들은 최대한 투자하고 정시든, 수시든 유리한 고지에 먼저 오를 거다. 따라서 불공정 논란도 남을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와 노동시장이 바뀌지 않는 한 그렇다. 그건 또 언제 바뀌겠나. 불공정이라는 부작용은 줄여야겠지만 오직 공정의 잣대만으로 입시를 설계할 수는 없다. 대입은 곧 고교 교육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3년을 바라보고 판단하면 좋겠다. 그 3년을 생각한다면 정시는 답이 아니다.

이영미 온라인뉴스 부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