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나 미국에 인접한 멕시코 국경도시 티후아나에 머물고 있는 중앙아메리카 출신 이민자 행렬(Caravan·캐러밴)은 우울한 성탄절을 보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잇따른 위협과 지지부진한 망명심사로 미국 입국의 희망을 잃어버린 캐러밴에게 남은 건 좌절감과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뿐이다.
온두라스 등 중미 출신 이민자 수백명은 24일(현지시간) 성탄절 전날을 맞아 티후아나 엘 바레탈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미국 성조기가 꽂힌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되고 멕시코 전통음식 타말레와 갓 구운 칠면조 요리가 등장했지만, 캐러밴 임시보호소에는 무거운 분위기만 감돌았다.
길게는 73일간 티후아나에 머물고 있는 이민자들은 미국 망명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자 감정의 동요를 겪고 있다. 온두라스 출신 호세 모레노스는 “미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이민자 행렬에 동참했지만, 이렇게 멕시코에서 멈출 것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에 말했다. 한 과테말라 남성은 “이렇게 힘든 여정이 될 줄 몰랐다”고 털어놨다.
온두라스 출신 여성 아이다 아세베도는 “신께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고향에 두 자녀를 놓고 온 아세베도는 큰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려 했지만, 장장 3600㎞를 이동해 이곳까지 온 고생길을 떠올리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가족도 지금까지 힘들게 싸웠는데 왜 돌아오려 하냐고 말렸다”고 했다.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최대 6000명에 달하는 캐러밴을 이끌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캐러밴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여러 조언을 해주던 시민단체 소속 ‘코디네이터’들이 지금은 티후아나를 떠났다고 LAT는 전했다. 한 과테말라 여성은 “이곳은 마치 부모 없이 방치된 집 같다”고 말했다. 온두라스 출신 남성은 “리더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캐러밴이 처한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캐러밴의 망명 신청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고, 최근엔 국경장벽 설치 예산을 위해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 사태도 불사하고 있다. LAT는 “캐러밴은 과거 이민자들이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정치적 지원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망명의 꿈이 멀어지자 멕시코로 눈을 돌리는 이민자들도 생기고 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캐러밴 600명가량이 멕시코에 망명을 신청했다. 멕시코 국립고용청은 캐러밴 1000여명이 멕시코에서 취업 허가를 받았고 3500여명이 취업비자를 신청한 상태라고 밝혔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은 여전히 삭막하지만 훈훈한 사연도 없진 않다. 미 애리조나주에 사는 한 여성은 최근 멕시코 국경도시 소노라주 노갈레스 거주 소녀들을 만나 성탄절 선물을 안겼다. 랜디 헤이스(60)는 얼마 전 멕시코에서 넘어온 풍선의 메모를 발견하고 방송국에 수소문해 8살 멕시코 소녀 다야미와 동생에게 인형과 그림 도구를 선물했다. 헤이스는 “6m 높이의 국경 장벽이 있지만, 어떤 것도 아이의 믿음과 소원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8일 미국 국경을 넘다가 국경수비대에 구금된 후 구토 증세를 보이다 하루 만에 숨진 과테말라 7살 소녀 재클린 에머이 로즈메리 칼 매퀸의 시신이 성탄절 전날인 24일 고향으로 옮겨졌다. 재클린 시신은 자신이 살았던 과테말라의 마을 산안토니오데코르테스에 도착했다. 재클린의 사망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필리페 곤살레스 모랄레스 유엔 이주특별보고관은 성명을 통해 미 정부에 재클린 사망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고 촉구했다.
조민아 기자 minajo@kmib.co.kr
멕시코 캐러밴 캠프 우울한 성탄… 리더 부재속 “희망 잃었어요”
입력 2018-12-26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