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투쟁하고 다른 곳에 취직하라고요? 사장한테서 두 번을 속아 12년을 싸웠는데 이제 와서 그만두면 평생 응어리가 질 것 같아 그렇게는 못합니다.”
성탄절인 25일 서울 양천구 서울에너지공사 앞에서 만난 파인텍 노동조합원 조정기(36)씨의 말이다. 그는 409일째 서울에너지공사 서문 옆 조립식 창고에서 지냈다. 추위 탓에 그는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시민단체가 만든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스티로폼 장식이 창고 옆에 세워져 있었다. 조씨는 “부모님과 연락이 끊긴 지도 8~9년 됐다. 함께 싸우던 동료 28명 중 이제 5명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의 동료 홍기탁 전 금속노조 파인텍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은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기록을 함께했다. 이들은 파인텍의 모회사 스타플렉스에 파인텍 직원 5명을 직접 고용할 것을 요구하며 409일째 75m 높이의 굴뚝에서 지내고 있다. 스타플렉스는 2010년 섬유가공업체 ‘한국합섬’을 인수한 후 1년7개월 만에 경영난을 이유로 그 회사를 폐업했다.
차광호 금속노조 파인텍지회장 등 한국합섬 전 직원들은 스타플렉스가 회사의 이익만 챙기고 내뺀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차 지회장이 2014년 5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408일간 고공농성을 이어간 끝에 스타플렉스는 파인텍이라는 자회사를 만들어 직원 28명을 고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김소연 비정규직노동자의 집 ‘꿀잠’ 운영위원장은 “100만원 남짓의 최소한의 돈만 주며 직원들에게 알아서 떨어지라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지난해 11월 12일 노동자 두 명은 고용주에게 약속을 지키라며 굴뚝 위로 올라갔다. 지상에 남아있는 세 명의 동료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하루에 두 번 바구니를 통해 식사를 올려 보내고 있다. 대소변과 갈아입을 옷들도 다른 바구니를 통해 오르내린다.
이날 최규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위원장은 굴뚝에 올라가 홍 전 지회장과 박 사무장의 건강을 살폈다. 건강검진을 끝내고 돌아온 최 위원장은 “한 명이 똑바로 누울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꼭대기 공간을 보니 어떻게 두 명이 저곳에서 409일을 버텼는지 의학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겉옷을 올리니 뼈밖에 안 보였고 심장 소리나 혈당, 혈압 모두 너무 좋지 않다. 당장 내려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현 정권이 ‘노동 정권’을 외쳤지만 진정성이 없다. 두 명의 노동자가 땅에 발 디딜 수 있도록 정부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
세계 최장 고공 농성자 “두 번 속아 12년 투쟁, 그만 못둡니다”
입력 2018-12-26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