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신 몸 ‘어묵’, 서민 반찬서 고급 간식으로 대변신

입력 2018-12-29 04:02
지난 24일 성탄절을 앞두고 인파가 몰린 수도권 신도시의 한 백화점 음식코너. 크리스마스 케이크 판매점보다 길게 줄이 늘어선 가게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쟁반에 담긴 것은 갖가지 어묵. 어묵고로케, 새우어묵가스, 베이컨말이 등 쇼핑객들은 저마다 집게를 쥐고 제과점에서 빵을 고르듯 어묵을 집었다. 긴 대기줄에서 계산을 기다리던 주부 곽모(37)씨는 “여섯 살인 아이가 어묵을 무척 좋아한다”며 “간식용으로 이틀에 한 번은 어묵을 사러 온다”고 말했다.

추억 속 길거리 음식에서 주인공 격인 떡볶이의 조연에 불과했던 어묵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종류도 다양해지고 생산량 또한 급증했다. 수출도 늘면서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과거 크기가 작은 물고기 등의 살을 으깨 만든 어묵은 주로 반찬으로 식탁에 올랐다. 엄마가 시장에서 사온 사각형 어묵은 고춧가루를 만나 반찬용 어묵무침으로 탄생했다. 어묵은 길거리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학생들과 직장인들은 분식집에서 꼬치에 끼워진 ‘오뎅’으로 출출한 배를 달랬다. 이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최근 10년간 어묵은 다양해졌다. 씨름 선수가 그려진 어육소시지는 치즈맛 등 새로운 상품이 출시됐고, 경쟁사 제품도 시장에 쏟아졌다. 멸치국물과 함께 간장에 찍어 먹던 꼬치오뎅도 각종 ‘핫바’로 탈바꿈 중이다. 심지어 반찬에 불과했던 어묵은 이제 당당히 고급 백화점 식품 매장의 인기 상품이 되고 있다.

종류도 빵 못지않다. 어묵크로켓, 단호박어묵, 연근어묵, 치즈말이어묵, 베이컨말이어묵, 매생이어묵, 김말이어묵, 대맛살어묵 등 수십 가지 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판매 방식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가게 앞에 서서 어묵을 먹던 광경은 고급 제과점에서 쟁반을 들고 빵을 고르듯 어묵을 구입하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어묵의 다양화는 어묵산업 규모를 키우고 있다.

2007년 4150억원에 불과하던 어묵산업 매출액은 2016년 8980억원으로 배 이상 불어났다. 2007년 6500명이던 어묵산업 종사자는 2016년 1만1300명으로 73% 급증했다.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S사의 경우 최근 5년간 종사자 수가 13.6배 증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중 20, 30대 청년은 207명으로 같은 기간 약 23배 증가했다. 어묵산업이 어느새 일자리 창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산 어묵에 대한 해외의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한국의 어묵 수출액은 2007년 2200만 달러였지만 약 10년 후인 2016년 5700만 달러로 2.6배 늘었다. 수출국은 주로 중국, 미국, 일본, 포르투갈 등이다.

해외에서 잘 팔리는 어묵은 어육소시지로 최근 10년간 수출액이 308배나 뛰었다. 한국 어묵은 중국에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데, 중국인들이 특히 어육소시지를 좋아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올여름 중국 CGV 영화관에서는 ‘케이피시(K-FISH)’ 제품으로 어육소시지를 팔기도 했다. 지난해 한국 어묵의 중국 수출 규모는 2741만 달러다. 고급 간식용 어묵 매장도 해외에 진출하고 있다. 한국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어묵 매장들은 미국과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 잇달아 해외 지점을 열고 있다.

어묵의 인기가 높아지자 생산 방식에 대한 고민도 시작되고 있다. 어묵산업의 가장 큰 장애물은 원료다. 현재 한국은 어묵 원료의 96%를 수입하고 있다. 베트남, 미국, 중국 등이 공급 국가다. 원래 국내 어묵은 조기 갈치 명태 등을 원료로 사용했다. 하지만 국내산 생선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가격도 비싸졌다. 어묵 종사자들은 한국 내에선 합리적인 가격으로 원료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도 어묵 원료가 귀한 건 마찬가지다. 전 세계적으로 수산 자원이 점차 줄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어묵 원료 수입 가격은 급상승하고 있다. 최근 미국산 어묵 원료 가격이 50%나 껑충 뛰어오른 상태다. 베트남과 중국 수입 원료 가격도 연 약 10%씩 상승하고 있다. 수입 원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 어묵의 경쟁력이 우려되는 이유다.

이에 해양수산부를 중심으로 원료를 국내에서 해결하자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다행히 어묵산업의 매출액이 증가하면서 업체들이 비싼 원료를 감당할 수 있는 여유도 조금씩 생겼다. 고급 간식용 어묵을 만드는 업체들은 수입산 원료에 국산 어종 원료를 섞는 시도를 시작한 상태다. 일부 업체는 전복어묵, 대게어묵까지 선보이고 있다.

정부도 틸라피아, 메기 등 양식 어종과 광어, 도루묵 등을 국산 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원료의 20~30%는 국산 어종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기후 변화 등으로 양식장 생선들이 모두 1등급 횟감으로 사용하기 어려워지는 점을 감안해 이를 어묵용 원료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양식 생산자와 어묵 업체 간 기대 가격이 맞을 경우 서로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 정부는 중소기업들이 어묵 원료를 공동 구매할 경우 융자 지원 및 생산 업체 알선 등의 지원도 제공할 계획이다.

해수부 관계자는 28일 “어묵산업은 일자리, 매출액, 수출액이 모두 지난 10년간 약 2배씩 증가하는 성장산업이 되고 있다”며 “2030년까지 어묵 시장을 2조원으로 확대하기 위한 발전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세종=전슬기 기자 sg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