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동방박사의 성탄

입력 2018-12-25 00:03

동방박사가 몇 명이었을까. 세 명? 네 명? 마태복음 어디에도 동방박사의 숫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박사들(마 2:1)이라고 돼 있다. 한 사람은 아니고 복수인데 몇 명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들은 문자적으로 점성술사다. 하늘의 별을 연구하고 국가나 개인의 미래와 운명을 알기 위해 점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점쟁이는 아니다. 요셉과 다니엘을 연상하면 되겠다. 요셉은 자신의 은잔을 훔쳐간 혐의로 체포된 형제들에게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창 44:15)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꿈을 해몽하지 못하자 박수와 술객, 점쟁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곳에 다니엘과 세 친구도 포함돼 있었다.

동방박사들은 당대의 학자이자 지혜자다. 그들은 별을 보고, 메시아의 탄생을 알게 된다. 그 별이 어떻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의 탄생을 알려줬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의미를 파악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별의 정체를 밝히려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느 것도 시원치 않다. 어떤 이는 핼리혜성이라 하고 다른 이는 그 당시 특이하게 밝은 빛을 내던 천왕성이라고 한다. 800년마다 한 번씩 만나는 목성과 토성의 결합이라는 말도 있다. 말 그대로 가설이지 정설은 아니다. 증명할 수도 없고, 성경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은 그들이 자신의 직업이자 전공인 천문학 연구로 메시아의 출현을 알게 됐다는 점에 있다. 그 별이 과학자들의 주장대로 자연적인 현상이었는지, 아니면 신학자들의 생각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나타난 것인지 결정은 유보하자. 그들이 별을 보고 메시아가 온다는 것, 그 메시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경배 드려 마땅한 존귀한 분이라는 것, 자신의 귀한 예물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성탄절의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을까. 동방박사들에게는 자신들이 하는 일 가운데 있었다. 그때 많은 박사들 가운데 그들이 선택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운명이나 섭리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들은 밤낮 일하고 공부했을 테다. 연구 과정에서 그리고 연구 결과로 그리스도를 만났다.

미국의 땅콩 박사 조지 카버의 일화는 늘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카버는 미국 남부의 흑인들에게 땅콩을 심으라고 권장했다. 풍작이 됐으나 가격은 폭락하고 만다. 원성과 항의를 받은 카버는 해결책을 찾고자 연구를 거듭해도 진척이 없자 원망조로 기도한다. 왜, 무엇 때문에 우주와 사람을 창조했느냐고.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신다. “너무 큰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네가 감당치 못할 쓸데없는 것을 묻지 말고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물어 보아라.”

카버는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하시려고 땅콩을 만드셨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대답이 걸작이다. “옳지, 됐다. 너는 땅콩을 한줌 들고 실험실로 들어가서 연구를 계속하여라.” 그것은 현문에 우답 같은데, 카버는 그 말을 듣고 연구실로 돌아갔다. 쉬지 않고 연구한 결과, 그는 땅콩에서 기름, 마가린, 비누, 화장품, 땅콩우유, 사탕, 땅콩버터, 잉크, 물감, 구두약, 연고, 크림 등을 만들어냈다. 흑인을 경제적으로 해방시켰다.

내가 하는 일 속에 그리스도는 계신다. 하나님은 심부름 잘하는 요셉을, 양을 치는 다윗을,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사야를 부르셨다. 베드로는 고기 잡고 그물을 정리하다가, 세리 마태는 세관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예외 없이 일하고 있는 그들을 하나님은 부르셨다.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다. 모든 일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

우리 몸으로 하는 모든 일이 예배다(롬 12:2). 내가 있는 곳이 예배당이고 내가 하는 일이 예배다. 동방박사들처럼, 카버처럼 내 하는 일 속에서 예수를 만나야 하겠다. 하는 일 속에서 예수를 만나지 않는다면, 오늘 성탄 예배는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한바탕 난리법석에 지나지 않다.(마 2:3) 동방박사처럼 공부하고 노동한 당신, 오늘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마 2:10)하는 예배가 되기를.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