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회사에 다니는 A씨는 회사 대표의 ‘집사’ 노릇을 했다. 대표의 자녀가 학원을 가거나 대표 아내가 병원, 백화점, 친정에 갈 때면 운전을 했다. 약수터에서 3~4통씩 물을 길어 배달하기도 했다. 대표는 교통비를 지급하지 않아 그는 대표 자택까지 1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다.
비정규직 B씨는 출근시간이 규정보다 40분 빨라야 했다. 상사가 먹을 고구마나 옥수수를 찌거나 라면을 끓이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상사는 자신의 흰머리를 뽑는 일까지 B씨에게 시켰다. 그보다 견디기 힘든 건 모욕이었다. 상사는 먹고 남은 음식을 모두 그에게 먹으라고 강요했다. B씨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 대표의 개를 목욕시키는 일까지 견뎠다”며 “처음 입사한 곳이었고 다른 사원들도 하기에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점점 자존감이 낮아지고 나 자신이 하찮아지기 시작하면서 많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투척 사건부터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엽기적 갑질까지 직장 내 비민주적인 관행에 대한 공분이 2018년 우리 사회를 강타했지만 직장 갑질은 여전하고 근로자의 울분도 계속되고 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하반기 접수한 직장 내 괴롭힘 제보 1403건 중 50건을 23일 공개했다. 직장 상사나 경영진에게 부조리한 괴롭힘을 당해 이 단체의 문을 두드린 이는 1년간 2만2810명이나 됐다. 주요 갑질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됐지만 일상의 갑질 근절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비락우유에 다니는 C씨는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초콜릿 21만원어치를 ‘강매’시킨다며 분노했다. 이 회사는 초콜릿 사업을 확장한 지난해 12월 이후 매달 19일을 ‘우리식구데이’로 지정해 사원들에게 초콜릿 구매를 안내했다. 형식은 ‘안내’였지만 직원들에게는 거의 강요였다. C씨는 “구매를 하지 않으면 인사에 불이익을 주는 등 피해 사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범죄 수준의 협박을 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 제보자는 “1년 전 회식자리에서 상사가 소주병을 거꾸로 쥐어 잡고 가격하려고 위협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제보자는 “상사가 서류에 틀린 부분이 있다며 커터칼을 꺼내 왼손 중지를 자르는 시늉을 했다”며 “도대체 어디까지 참아야 하느냐”고 호소했다.
지난 1년간 직장 상사나 임직원의 갑질에 대해 사회 전반적으로 문제의식은 높아졌다. 김선업 고려대 한국사회연구소 교수는 “갑질이 언론에 부각되고, 사회적 질타를 받으면서 사람들의 감수성이 높아지고, 기업도 여론의 압박을 받고 조심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큰 변화는 여전히 감지되지 않는 분위기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문제의식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조직의 위계질서는 공고하고, 을은 막강한 인사권을 휘두르는 갑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최 교수는 “불안정한 고용 때문에 비정규직 등은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갑질을 견딜 수밖에 없다”며 “고용 안정을 찾는 것이 구조적인 갑질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도 “회사 내부 문제에 (시민단체 등) 외부에서 개입하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며 “내부적으로 갑질 문제를 해결할 통로를 마련하고, 사법적 처벌 근거를 마련해야 근본적인 해결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
“나는 사장의 사노비였다”… 멈추지 않는 을의 고통
입력 2018-12-24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