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주체들이 제 이익만 앞세우면 그 이익도 못지킨다”

입력 2018-12-20 04:02
이주열(왼쪽) 한국은행 총재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9일 서울 중구 한은 본관에서 첫 오찬 회동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최종학 선임기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공개적으로 노동자와 기업, 정부의 태도를 꼬집었다. 이 총재는 “각 경제주체가 자신의 이익만 앞세우면 장기적으로 그 이익도 지켜낼 수 없다”고 말했다.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중앙은행 총재로서 이례적인 발언이다. 경제계 곳곳에서 규제와 혁신을 놓고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통화정책의 한계를 토로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만큼 한국 경제가 처한 여건이 나쁘다는 사실은 분명히 엿보인다.

이 총재는 지난 18일 출입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바깥세상에 비해 우리 내부의 변화는 아직 더디기만 하다”며 “규제 완화와 투자 확대는 당사자들의 이해 상충, 기존 사고방식·관행 등에 가로막혀 그 성과가 미진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경제가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활력을 찾으려면 지금부터 정부와 기업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며 각 경제주체의 태도를 지적하는 메시지를 꺼냈다. 속뜻이 뭐냐고 묻자 이 총재는 “지금까지 성장을 이끌어온 업종이 상당수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특정 (산업)부문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은 아니다”고 했지만, 이 총재의 작심발언은 최근 노동시장에서 불거진 갈등들이 배경이라는 관측이 많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노동시장은 일반적으로 거시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슈였지만 최근 들어 최저임금 문제, 근로시간 단축 등은 리스크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광주형 일자리’를 예로 들며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자원이 재배치돼야 하는데, 그 과정들이 이해당사자들의 문제에 부닥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카카오의 카풀서비스를 예로 들며 “정말 결정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해에는 최저임금이나 주52시간 근로제 같은 큰 정책 외에도 광주형 일자리, 카카오 카풀서비스, 카드수수료 개편 등 각 경제주체의 뜻이 부딪히는 현안이 유독 많았다. 갈등의 이유는 결국 일자리이기도 하다. 광주형 일자리에 반발한 현대차노조는 파업을 불사했다. 택시기사들은 카카오 카풀 중재안을 거부했다. 한 택시기사는 유서를 남기고 국회 앞에서 분신했다.

다양한 갈등이 국제 흐름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낳는다는 게 이 총재의 걱정이다. 그는 지난 11월 한·중·일 중앙은행 회의를 위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판 실리콘밸리’ 중관춘에 들른 경험을 더듬었다. ‘중국제조 2025’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우리도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이 총재는 “반도체가 우리의 성장세를 지탱하고 있지만 얼마나 지속될지 자신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가파른 저출산·고령화 속도가 고민을 더한다고 첨언했다.

이 총재의 토로는 이례적이지만 적절한 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저성장 시대에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에너지가 집중되고, 함께 더욱 어려워진다”며 “이런 상황에서 서로가 협조해 ‘파이’를 더 키워야 한다는 적당한 지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통화정책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노동시장, 산업구조 개편 문제 등이 대두된 상황에서 나온 의미 있는 진단”이라고 했다.

이 총재는 19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나서도 경기 둔화 우려를 전달했다. 그는 “방심하기에는 엄중한 리스크 요인들이 상존해 있다”는 말로 신임 부총리를 맞았다. 이 총재와 홍 부총리는 체감경기, 투자, 고용지표가 부진한 상황이라는 데 깊이 공감했다. 미·중 무역전쟁의 장기화 우려, 소득보다 빨리 늘어나는 가계부채, 불투명한 향후 성장동력 등을 다루는 무거운 대화가 오찬 테이블에 올랐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