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부터 무대에 오른 예인(藝人), 32명의 얼굴을 간직한 배우, 전통의 현대화를 이끈 혁신가. 내년 3월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퇴임을 앞둔 배우 김성녀(68)가 인생 2막을 여는 무대에 섰다. 연극 ‘맛있는 만두 만드는 법’(연출 정의신)이다.
연극은 자식을 사고로 잃고, 재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인 세탁소에서 쫓겨난 엄마 영순의 이야기를 그린 모노드라마다. 서울 성동구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오는 23일까지 막을 올린다. 18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에서 만난 김성녀는 “웃음과 눈물을 오가며, 희망을 말하는 드라마”라고 설명했다.
“정공법으로 ‘삶’을 마주하는 연극이에요. 비극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영순을 통해 무겁지 않게 풀어나가요.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얘기라는 점에서 세월호나 대구 지하철 참사처럼 아픔을 지닌 분들에게 위로와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첫 모노극은 ‘벽속의 요정’이었다. ‘모노드라마의 전형’이라는 평을 받으며 2005년 초연 이후 14년째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40년 동안 벽 속에 숨어 사는 아버지부터 어머니, 딸까지 32역을 그는 별다른 소품 없이 홀로 소화해냈다. 농익은 기량을 보여주는 그이지만, 이번 작품은 유독 힘들었다. 첫 도전에서 받은 찬사만큼 부담이 컸다.
“아류처럼 보일까 불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배우의 생명력은 변신에서 나오잖아요. ‘김성녀 맞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벽속의 요정’이 제 삶을 32조각으로 표현했다면, 이번엔 엄마의 내면이란 한 조각을 아주 깊게 파고들었어요.”
중앙대 교수로 재직 중인 김성녀는 연출계 거장 손진책의 아내이자, 여성 국극 개척자 박옥진의 딸이다. 어렸을 적부터 천막극장을 놀이터 삼아 무대에 오른 그는 지금껏 판소리 마당놀이 창극 연극 영화 뮤지컬 등 전 장르를 넘나들며 공연을 선보여온 진성 ‘예술가’다. “모든 게 숙명처럼 다가왔다”는 그는 배우를 “제사장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춤이든 노래든 예술은 동·서양 모두 제사에서 시작돼요. 원초적이고 강렬한 감정을 관객에게 전해주는 매개이자 제사장 같은 존재가 배우인 것 같아요. ‘배우’(俳優)의 ‘배’자를 파자하면, ‘사람(人)이 아니다(非)’가 되는 것도 같은 맥락 아닐까요.”
그를 ‘혁신가’로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2012년부터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지낸 김성녀는 지난 7년간 전통에 젊음을 불어넣는 작업을 했다. 그는 국립극장과 함께 ‘심청이 온다’ ‘춘향이 온다’ 등 마당놀이를 부활시켰다.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 같은 실험적인 작품을 계속 내놓으며 창극의 외연을 넓히고, 젊은 관객까지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 초반 우려 섞인 시선에도 버틸 힘을 준 건 ‘관객’이었다.
“판소리는 전통으로 지켜나가야 하지만 창극은 태생부터 시대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개척자의 일을 하다 보니 항상 외롭고 힘들었는데, 늘 기대하면서 매진으로 답해준 관객들이 있었기 때문에 원동력을 잃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인생의 새 막을 준비하는 김성녀의 꿈은 “배우로 온전히 거듭나는 일”이다.
“세탁소 엄마로 첫발을 떼게 됐어요. 시작이 반이라는데, 죽는 날까지 좋은 배우로 남고 싶은 꿈의 절반을 이룬 셈이죠. 연기에 목말라하는 국악 제자들을 위한 아카데미도 운영해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첫째, 건강해야겠죠(웃음)?”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세월호 참사처럼 아픔 겪는 분 연극으로 위로합니다”
입력 2018-12-19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