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참사로 떠난 아내 이어 ‘집’ 기부하는 류건덕씨

입력 2018-12-19 18:51
류건덕씨가 지난 12일 강원도 정선의 한 고등학교에서 첫 기일을 앞둔 아내 이항자씨 이야기를 하던 중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류씨의 후원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완공된 집에 부부의 명패를 붙이는 자선재단 선교사(왼쪽)와 현지 노동자.
33년을 함께한 아내는 검게 그을린 가방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문자는 ‘오늘도 좋은 하루’. 반찬을 기다리는 이웃이 많다며 교회 봉사모임에 가는 길에 보낸 메시지였다. 남은 인생 언제쯤 좋은 날이 올까. 그날 이후 류건덕(59)씨는 매일 되물었다. 엄마를 잃은 딸도, 다른 희생자 28명의 유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절망한 류씨에게 살아갈 이유가 돼준 작은 비밀을 남긴 건 아내였다.

충북 제천 노블휘트니스앤스파 스포츠센터 화재참사 1주기를 앞둔 지난주 사고로 아내 이항자씨를 잃은 유족 공동대표 류씨를 만났다. 그는 아내가 준 ‘미션’ 얘기를 했다.

강원도 정선의 한 고등학교 교감인 류씨는 아내가 떠난 뒤 유품으로 제법 큰돈이 든 통장을 발견했다. 아내의 기부 비자금 통장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들에게 물어본 끝에 류씨는 그간 아내가 자신 몰래 벌인 기막힌 일을 알게 됐다. 아내는 생전에 필리핀·미얀마·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의 빈민을 위한 집짓기 자선사업에 참여했다. 아내의 목표는 사랑의 집 10채를 기부하는 것이었다. 이미 생전에 2채를 지었다. 아내는 꽃집에서 틈틈이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가족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고 스스로 봉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생각해보니 ‘몰래 기부’는 딱 아내가 벌일 법한 일이었다. 평생의 절반을 함께 보낸 동갑내기 류씨 부부는 교사 남편의 박봉으로 외동딸과 조카 2명을 무탈하게 키워낸 가정의 동반자이자, 봉사활동을 함께 펼친 신앙의 파트너이기도 했다. 통장의 돈은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었다. 류씨는 아내의 뜻을 잇기로 했다. 아내가 후원했던 자선재단에 지난 1년간 똑같은 방식으로 기부했다. 그렇게 말레이시아에 3채의 집을 더 세웠다. 이제 아내의 목표까지 남은 건 5채. 류씨는 “은퇴가 몇 년 안 남았지만 계속 돈을 모아 집을 짓겠다. 그게 죽은 아내에 대한 살아남은 사람의 도리”라고 했다. 아내가 남긴 옷도 모두 정리해 기부했다.

아내가 남긴 숙제는 류씨가 유족 대표로 힘든 소송을 이끌어간 힘이 됐다. 제천 화재참사의 유족들은 지난달 소방관 불기소처분에 불복해 항고했다. 류씨는 지금도 다른 유족들과 함께 국회의원, 변호사 등을 만나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 류씨는 “소방관들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며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길까 두려워 넘어갈 수가 없었을 뿐”이라고 했다. 증오가 아니라 안전을 위한 소송이라는 뜻이다.

류씨에게 남은 걱정은 이제 딸뿐이다. 서른을 넘긴 딸은 이미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친정 엄마의 빈자리가 더 커질 거라는 사실을 류씨는 알고 있다. 류씨는 아내의 손맛을 재현하기 위해 요리를 배웠다. “아내의 음식을 모두 시도했어요. 특히 아내가 잘했던 오이소박이를 거의 완벽하게 따라했는데 딸이 엄마보다 잘했다고 하더군요.”

정선=글·사진 김철오 기자, 강문정 인턴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