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분노가 이른바 ‘거악(巨惡)’으로 분류되는 권력형 범죄보다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강력범죄에 쏠리고 있다. 올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범죄와 관련한 청원 글은 이 같은 경향을 잘 반영한다. 공공의 분노가 반영된 많은 추천을 받은 글 속의 범죄는 대체로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일상적 삶 속에서 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게 지난 10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등장한 서울 강서구의 한 PC방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에 대한 글이다. ‘경찰에 붙잡힌 피의자가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데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형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글은 하루 만에 청와대 답변 기준인 20만명 추천을 넘어섰다. 119만여명이 청원에 동의했다. 이 사안으로 사회 전체가 들썩였다. 국민적 공분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표출됐다는 평가에 이견은 없었다. PC방 사건뿐이 아니었다.
지난 18일까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의 답변을 이끌어낸 청원은 65개다. 이 중 28개는 살인 사건, 성폭력 사건 등 강력범죄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나 강력범죄의 진상 규명 또는 피해자 보호를 촉구했다.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이 추천한 청원에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가 답한다’는 답변 기준에 비춰볼 때 행정적 사안에 관한 건의가 많을 것이라던 예상과는 다른 현상이다.
지난 11일 강서구 PC방 사건과 함께 김형연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답변한 다른 청원 3건도 심신미약으로 가해자가 감형됐거나 감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담겨 있었다. 그중 한 건은 폐지 줍던 50대 여성을 20대 남성이 무차별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몸집이 작은 피해 여성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도 20대 남성이 상대를 마구 폭행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격분했다. 40대 남성이 약국에 들어가 약사와 직원을 위협하고 흉기로 찌른 사건에 관한 글도 있었다. 해당 청원에서 ‘가해 남성은 과거 정신과 치료 기록을 이유로 감형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언급됐다.
성범죄 관련 청원 글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아동·미성년자 성폭력에 대한 처벌 강화 관련 청원이 두드러졌다. 초등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다치게 한 혐의로 징역 12년을 받고 복역 중인 조두순의 출소 반대를 요구하는 청원도 그중 하나다.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은 지난해 12월 한 차례 답변이 이뤄지고 1년 만인 지난 18일 다시 한 번 답변 목록에 올랐다. 지난해 해당 청원에는 61만5354명이 동의했다. 당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조두순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는 불가능하지만 조두순 때문에 성폭력특례법이 강화됐다”며 “심신장애 상태의 성범죄에 대해 감경 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 향후 이 같은 일이 설혹 발생하더라도 조두순같이 가벼운 형을 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권력형 범죄보다 강력범죄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에 대해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21일 “개개인의 삶에 직결되는 문제를 더 심각하게 보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곽 교수는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범죄들에 대해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영향을 받고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검찰 관계자도 “요즘 많은 사람이 생활과 밀접한 사건에 더욱 공감하고 분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강력범죄 사건을 접하면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이에 대한 분노가 수사 및 재판으로 결정되는 처벌 수위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피부로 느끼는 범죄에 대한 분노와 우려는 실제 강력범죄가 늘어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대검찰청의 분기별 범죄동향 리포트에 따르면 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 범죄를 집계한 ‘강력범죄’는 2016년 3만2919건에서 지난해 3만5954건으로 증가했다. 올해는 1분기 7302건과 2분기 8868건을 더해 상반기 1만6170건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상반기 1만5848건에 비해 강력범죄가 더 증가했다. 전체 범죄가 2016년 200만3416건에서 지난해 181만7860건으로 줄고 올해 상반기도 83만8401건으로 감소 추세를 보이는 것과 비교하면 강력범죄 증가 추세가 두드러진다.
특히 성폭력 범죄 증가가 확연히 눈에 띈다. 강간, 강제추행, 카메라 등 이용 촬영 성범죄 등을 포함하는 전체 성폭력 범죄는 2016년 2만9317건에서 지난해 3만2752건으로 늘었다. 올해도 상반기 1만4531건으로 집계돼 지난해 같은 기간의 1만4188건보다 증가했다. 연인 등의 신체를 불법 촬영하는 ‘카메라 등 이용 촬영’ 성범죄는 2016년 5242건에서 지난해 6612건으로 늘었다.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 범죄도 2016년 1112건에서 지난해 1259건으로 증가했다.
이 같은 변화는 검찰의 수사 방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검찰은 민생범죄에 수사력을 집중하겠다고 밝히며 형사부 강화를 여러 차례 공언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지난달 간부회의에서 “최근 강력범죄나 음주운전 등에 대한 미온적 법 집행을 우려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다”며 “다수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 범죄에 대한 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형사부 전문화를 위한 노력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한다”고 밝혔다.
대검 형사부가 최근 전국 검찰청 여성·아동 대상 전담검사, 수사관 등 100여명이 참여하는 워크숍을 개최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됐다. 대검 형사부는 지난달 8~9일 성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 등 여성·아동 대상 범죄에 대한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워크숍을 진행했다. 검찰은 지난 10월에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식별이 가능한 경우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는 내용 등의 불법 촬영 범죄사건 처리 기준을 마련했다.
안대용 기자 dandy@kmib.co.kr
국민청원, 수사 판도를 바꾸다, ‘혹시 나에게도…’ 일상으로 파고 든 강력범죄
입력 2018-12-23 13:09 수정 2018-12-2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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