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약속의 땅, 그리고 포로로 끌려온 낯선 땅. 주전 6세기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회복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것이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체념했습니다.
이런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시니라.”(1절)
이 ‘위로하라’는 말에는 고통당하는 백성을 위로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이사야 40장부터 시작되는 ‘회복 약속’의 표제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자들을 보내셔서 절망 속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는 이 ‘위로 사역’의 수혜자입니다.
우리는 수혜자의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마음이 상하고 육신이 병들어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삶에 절망하고 고난의 벽 앞에서 상심한 이들에게 이 위로의 소식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다가가 위로해야 합니다. 함께 울어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저는 지난 11월 4일부터 10일까지 르완다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다녀온 비링기로 마을은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큼직한 돌덩이가 곳곳에 박혀있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마을에 도착했는데 방문하기로 한 집은 1시간 정도 더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좁고 험하며 미끄럽고 위험하기까지 한 길을 걸어서 사무엘이란 어린이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어린이들은 매일 이런 험한 길을 다니겠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희 일행이 찾아간 곳은 부모를 잃고 오빠와 두 여동생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11살 사무엘과 8살 알리나, 5살 클레멘타인. 작고 여린 아이들에게 먹거리라곤 옥수수와 감자, 카사바가 전부였습니다. 이마저도 없을 땐 1시간을 걸어 내려와 호숫가에서 낚은 손가락만한 물고기 몇 마리가 이들의 일용할 양식이 됩니다. 하루에 한 끼, 그마저도 안정적이지 못해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니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제대로 된 수도시설이 없어 개울가까지 힘들게 가서 길어온 흙탕물을 정수조차 하지 않고 식수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전하고 있는데 저희 일행 중 한 분이 둘째 알리나가 조금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눈이 충혈돼 있었고 고열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급히 차에 태워 키갈리 시내의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의사의 진단 결과 말라리아였습니다. 알리나는 곧바로 치료를 받았고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보냈구나’란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르완다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는 이 아이들 같은, 혹은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로하며 돌보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서 이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이들 마음에 닿도록 위로하며 돌봐줘야 하고 희망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르완다는 내전으로 100여일 만에 100만여명이 학살당한 처참한 고통의 역사가 있는 땅입니다. 지금은 용서와 화해가 뿌리내리고 있는 희망의 땅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만난 한 르완다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용서합니다.” 살기 위해 용서를 결단한 이들에게 용서하기 위해 죽음을 결단한 예수님을 전해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공허한 말에 그치지 않도록 진실한 사랑과 나눔으로, 위로의 사역으로 보여주십시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시니라!”
최명우 목사(순복음강남교회)
[나눔설교] 위로의 사역
입력 2018-12-20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