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비정규직·청년에게 떠넘긴 위험… 죽어 나가는 김군들

입력 2018-12-17 04:01
시민들이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故) 김용균 2차 촛불 추모제’에 참석해 ‘외주화 중단하고 정규직화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과 촛불을 들고 있다. 뉴시스
김씨(왼쪽)가 사고 발생 열흘 전인 지난 1일 비정규직 노동 환경 개선 캠페인에 참여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회사에서 발견된 김씨의 유품(오른쪽)에선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컵라면과 과자가 나왔다.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제공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스물 넷 청년 김씨는 지난 1일 비정규직의 근로 환경 개선 캠페인에 참여해 팻말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로부터 열흘 뒤 그는 근무 중에 안전장치가 부실한 컨베이어 벨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밥 먹을 시간이 없어 끼니를 때우던 컵라면이 유품으로 발견됐다. 2년 전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중 전동차에 치여 사망한 김모(19)군의 가방에서도 컵라면이 나왔다.

지난 11일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면서 현 정권이 출범 당시 ‘안전한 일터’를 내세웠지만 이전과 바뀐 게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잇따라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자 추모 물결도 확산되고 있다.

민주노총 등 총 70개 단체로 꾸려진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 사고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시민대책위원회’가 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연 2차 촛불 추모제에는 시민 400여명이 참여했다. 참가자 이모(35)씨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에 이어 자꾸 같은 비극이 반복된다”며 “아직도 생명을 담보로 일해야 하는 곳이 많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 정부가 의지가 있다면 더 늦기 전에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에서 온 홍모(47)씨는 “내가 20대 때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 똑같은 일을 해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민대책위는 오는 21일 광화문광장 등에서 ‘1100만 비정규직 촛불행진’을 열 예정이다.

지난 14일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은 태안화력 사고 현장을 조사한 결과 안전장치가 부실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석탄을 옮기는 컨베이어 벨트에 이상 소음이 발생하면 벨트 사이를 살피는 일을 했다. 관련법에 따르면 사업주는 기계의 원동기 등 근로자가 위험에 처할 우려가 있는 부위에 덮개와 같은 안전장치를 설치해야 한다. 또 위험 발생 시 즉시 벨트를 정지할 수 있어야 한다. 조성애 공공운수노조 정책국장은 “사고 현장에선 기계의 고속 회전체가 고스란히 외부에 노출돼 조금만 옷깃이 스치더라도 중대 재해 및 사망 사고의 위험이 상존했다”며 “벨트를 정지하는 비상 스위치가 있긴 했지만 회사가 ‘2인 1조’ 근무 규칙을 어기고 김씨 혼자 근무하게 해 전혀 쓸모가 없었다”고 말했다.

안전 문제는 두 달 전 시행된 정기 점검에서도 걸러지지 않았다. 고용노동부가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태안 화력발전소는 지난 10월 기계의 위험 부분에 덮개가 있는지 등을 살피는 안전검사에서 합격했다. 이태성 시민대책위 간사는 “2인 1조 근무체제가 지켜지고 있는지는 살펴보지 않은 부실한 점검”이라며 “현장조사를 나갔을 때 덮개 같은 건 없었다”고 지적했다. 서부발전이 산재로 사망한 근로자 수를 축소 보고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박정 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서부발전은 2008년부터 9년간 산재 48건이 발생해 6명이 사망했다고 지난해 보고했지만 이날 제출한 자료에선 같은 기간 52건의 사고가 발생해 10명이 사망했다고 말을 바꿨다. 서부발전 측은 ‘산재 처리가 안 된 상태에선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 정부가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비정규직의 근로환경 개선을 표방하지만 ‘시늉’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부발전을 포함한 한국전력 발전 자회사 5곳은 지난 10월 이사회를 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자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비정규직을 자회사의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으로 ‘무늬만 정규직화’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인권위가 몇 차례 하청 노동자의 근로 환경을 개선하라고 권고하고 관련 법안도 발의됐지만 여전히 많은 하청 노동자가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2012∼2016년 국내 5개 발전 기업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346건 중 하청 노동자 산재는 337건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단순히 이번 사고가 김씨가 비정규직이어서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도 “사업주가 산재 예방 관련 실효성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정부가 유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안규영 박상은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