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로운 부자의 대문 앞에서 거지 나사로는 항상 배가 고팠고 아프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지옥 불길 속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삶은 죽음 이후 전혀 다르게 전개됩니다.
나사로는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지만 천사들에게 들려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합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사스런 장례 후 지옥에 내려가 괴로움을 받습니다. 그는 나사로가 마시는 물 한 방울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닫혔던 문이 죽음 후에는 큰 구렁텅이가 되어 서로의 왕래를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이릅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25절)
부자가 지옥에 내려간 건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자의 운명을 말할 때 나사로의 운명에 대한 설명도 같이 붙습니다. 이렇듯 두 사람의 운명은 깊이 연결돼 있었지만 부자는 나사로에게 무관심한 채 가진 모든 것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이웃에 관심을 갖고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시간과 노력, 물질과 재능 어느 것이든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 나눠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마을에 굶주려 죽는 사람이 있다면 온 마을 사람들이 살인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많은 노동자가 쓰레기를 치우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것을 치우도록 욕심껏 먹고 많은 물질을 소비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해진 옷을 입은 노숙자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비싼 옷을 입고 그 옆을 지나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외국이나 최근의 이슈를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빵을 먹으면서 만들 줄은 모르는 것, 노동하지 않은 손이 부끄러운 것이다.”
한 노부인이 죽어 심판관 앞으로 갔습니다. 생의 기록을 조사하니 부인이 사랑을 베푼 일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단 한 번 굶주린 거지에게 죽 한 그릇을 준 것을 빼고는 말입니다. 그게 유일한 사랑이었지만 부인은 죽 한 그릇에 힘입어 하늘나라로 올라갑니다. 부인이 그릇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보이지 않는 줄에 올려지듯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부인의 도움을 받은 거지도 그릇 가장자리를 잡고 같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죽 한 그릇의 작은 사랑이 두 사람을 하늘로 이끈 것은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힘은 많은 사람을 살려냅니다. 비록 내 손에 있지만 그것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남과 나눌 때 많은 이를 살리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욕심에 눈이 어두워 내 손에 있는 것을 오직 내 것이라 고집할 때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나사로의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시다’는 뜻입니다. 부자의 손이 나사로를 도왔다면 부자의 손은 ‘주님의 손길’이 됐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어디에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를 생각해 작은 물질이라도 보내야 합니다.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어 설사병으로 목숨을 잃는 주민을 위해 우물 파기에도 팔을 걷어붙여야 합니다. 병든 환자를 위해 의료봉사를 해도 좋습니다. 작은 관심과 참여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웃을 내 구원의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을 확인하기 위해 멀리 순례를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가까이 있는 ‘너’를 돕는 것이 곧 ‘나’를, ‘내 영혼’을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박노훈 목사(신촌성결교회)
[나눔설교] 죽 한 그릇
입력 2018-12-17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