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호 (13) 美 매네스 음대 졸업 후 한인교회 찾아 찬양

입력 2018-12-17 00:00 수정 2018-12-17 09:27
박종호 장로가 한국예수전도단에 헌금해 지어진 인도 꼴르나랴 고아원에서 원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

“5년만 일찍 학교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종호는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졌어.”

미국 매네스 음대 루스 팰컨 교수가 수업시간마다 내게 한 말이다. 팰컨 교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푸치니 오페라를 주로 공연하는 소프라노였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5년이 아니라 50년을 늦게 왔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 분임을 나는 안다. 서두르지 않으시지만 결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는 이러한 믿음 아래 2002년 5월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뒤늦은 유학생활을 끝마쳤다.

졸업 직후 하나님은 뉴저지주의 한 교회 무대로 이끄셨다. 미국 유학의 첫 열매를 교회에 드린 셈이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분을 찬양하는 일이야말로 의심할 나위 없이 큰 축복임을 알았지만 내면으로는 고민이 적지 않았다. 기독 문화를, 복음성가 가수를 대중문화 가수보다 얕잡아보는 교회의 시선을 다시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미국에서 이민자로 어렵게 살아가는 한인교회 성도들을 보며 눈 녹듯 사라졌다.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한 한인교회 찬양집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회엔 100여명의 성도가 모였는데 대부분 집회 내내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알고 보니 성도 가운데는 미군과 결혼해 이민 온 여성도가 적지 않았다. 오랜만에 한국어 찬양을 듣고 고향이 생각나 한없이 울고 계신 것이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한 교회에서 찬양했을 때다. 그곳에도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한 여성, 생계를 위해 때로는 막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이민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교회 목사는 폐암 말기였고 사모는 한인식당에서 일하며 성도들을 섬기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모조리 쓰는 이들을 보며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때 ‘고통 받는 주님의 종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치료비가 없어 뇌종양 치료도 못 받고 때때로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해결한다는 한국예수전도단(YWAM) 소속 선배 선교사 소식은 더욱 찬양사역의 길로 발걸음을 떼게 한 촉진제가 됐다. YWAM은 ‘믿음선교’의 원칙이 있다. 선교사에게 긴요한 것이 있어도 후원요청을 따로 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방식이다. 이런 믿음은 매우 귀한 것이지만 뇌종양 환자로 영국 무슬림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쓰레기통을 뒤져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 선교사는 내가 사랑하는 선배 선교사로 친한 형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한인업소 주소록을 구입해 미국 50개주에 있는 한인교회에 전화를 돌렸다. 응답을 한 교회를 찾아 외롭고 고달픈 이민자들을 위해 찬양을 불렀고 마지막엔 이들에게 가난한 선교사를 위한 후원을 요청했다. 한인교회 성도의 헌신적인 지원 덕분에 2002년부터 매달 1만2000달러를 YWAM에 보낼 수 있었다. 이 후원금은 현재 YWAM 해외 선교사의 건강검진비로 쓰인다. 일부는 탄자니아와 인도에 고아원과 우물을 세우는 데 쓰였다. 찬양으로 주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게 보이면서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