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믿고 지시 순응 위기 돌파 “남북교류 관련 어떤대책 있나”

입력 2018-12-16 21:15
지난달 7일 남북보건의료 분과회담이 열린데 이어 12일에도 남북 보건의료 실무회의를 진행된 가운데, 남북간 감염병 공동 대응 방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발’ 감염병 위협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고 북한 역시 남한에서 유래한 신종 감염병이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감염병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지난 1일 홍콩으로 날아가 2003년 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 이하 사스)의 흔적을 더듬어봤다. 취재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어렵사리 만난 여러 인사들은 입을 다물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 일쑤였다. 홍콩인들에게 사스가 얼마나 쓰라린 기억인지를 가늠케 했다. 실제로 당시 299명이 사망하는 동안 홍콩은 부동산과 주가가 곤두박질치며 거리로 내몰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재앙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중국의 광둥성에서 창궐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 해 3월 홍콩 구룡반도 몽콕 한 호텔에서 시신 1구가 발견됐다. 여기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SARS-CoV)가 처음으로 분리됐다. 치료제는 없었다. 몽콕의 야시장을 비롯해 도시는 정적에 휩싸였다. 손님이 끊긴 쇼핑몰과 식당들이 문을 닫았다. 왕웨이(45·가명)의 부모가 운영하던 식당도 이때 간판을 내렸다.

당시를 기억하면 왕웨이는 지금도 악몽을 꾼다. 병마가 그를 덮쳤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 집계된 1799명의 환자 중 한 명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이후의 홍콩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극도로 심화된 양극화에 왕웨이 같은 서민들은 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건강을 염려한 사람들은 추가적인 민간보험을 너도나도 들기 시작하면서 보험사들은 쏠쏠히 주머니를 불렸던 것이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홍콩인들도 사스라는 위기 앞에서는 홍콩 보건당국의 지시를 성실히 따랐다. 사스가 홍콩에 전파된 이후 홍콩정부는 방역 등의 정보공개를 투명히 공개했다. 언론도 자중했다. 대중에게 과도한 공포가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홍콩 정부 관계자의 귀띔이다. 그는 반문했다. “만약 치명적인 감염병이 남북을 덮치면 전쟁 이상의 공포가 될 텐데, 어떤 대비가 되어 있는가?” 기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홍콩=김양균 쿠키뉴스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