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북녘 향한 옥탑방 思婦曲… “기도 속에서 늘 당신을 만납니다”

입력 2018-12-14 18:29 수정 2018-12-16 17:53
장기려 박사 (1911~1995)
부산 송도해수욕장이 보이는 고신대복음병원 3병동 옥상. 의사 장기려는 1985년 이 옥상에 옥탑방을 마련해 기거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염려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가졌다”고 말하곤 했다.
장기려 박사의 아내 김봉숙(2004년 작고).
1951년 부산 영도 제3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진료소. 장기려 박사가 초대 원장이었다.
위 사진은 부산 송도 고신대복음병원(옛 복음진료소). 장기려 추모 예배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아래 사진은 부산 동구 장기려기념관 ‘더 나눔센터’. 관람자가 기도문을 트리에 달고 있다.
부산 송도 앞 바다에 석양이 짙었다. 바다가 보이는 고신대복음병원 정원 크리스마스 트리 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 6일 부산 암남동 고신대복음병원. 언덕배기에 자리한 병원은 아픈 사람들로 붐볐다. 그 병원 정문과 건물 벽에 걸린 익숙한 이름의 현수막이 시선을 끌었다. ‘마음까지 치료한 아름다운 의사 장기려 박사 23주기 추모예배 및 기념식’. 12월 14일 오후 4시 고신대복음병원 예배실에서 행사가 진행된다는 내용이다.

그 ‘아름다운 의사’ 장기려는 세상 사람들에게 성자로 회자된다. 1995년 12월 25일 새벽 1시 45분 하나님 품에 안겼다.

고신대복음병원은 26개 과에 16개 병동, 953 병상수를 갖춘 부산·경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종합병원이다. 1951년 6월 부산 영도 제3영도교회에서 시작된 구제병원이었다. 6·25전쟁 와중이었다. 장기려는 무의진료천막 정도에 지나지 않던 이 구제병원 복음진료소의 원장이었다.

평북 용천 출신의 그는 피난민이었다. 부산은 일가붙이 하나 없는 낯선 곳이었다. 그는 열네 살 무렵 세례를 받고 미션스쿨 송도고보를 졸업한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 전신)에서 수학하며 일제강점기를 살아냈다.

“…음성이 들리기를 ‘너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셨는데 왜 너는 그것을 믿지 않고 낙망하고 있는가’ 하시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나의 생명을 바칠 분은 없다….”(장기려 신문 연재 글 ‘방황의 학창’ 중에서)

장기려는 송도고보 시절 이처럼 회심한 기독청년이었다. 이 신앙고백을 평생 안고 살았다.

행려병자 거두는 ‘바보 의사’

장기려는 ‘바보 의사’라고 표현될 만큼 이웃을 위한 의술을 펼친 현대사의 인물이다. 돈 없는 환자가 병원비를 내지 못하자 도망가도록 뒷문을 열어 놓고 그 책임은 당신이 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난 11월 ‘알쓸신잡3’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장기려를 거론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새롭게 인식되기도 했다. 그는 말년을 고신대복음병원 3병동 옥탑방에서 머물며 북에 두고 온 아내 김봉숙(2004년 작고)과 다섯 자녀를 그리워했다. 집 한 채 없는 무소유의 삶이었다.

장기려는 여섯 자녀 가운데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했다. 그리고 공산군을 피해 무개열차를 타고 부산에 정착, 철저히 예수 정신으로 살았다. 그는 의술로 가난한 이웃에게 희망이 되고자 했다. 행려병자를 거두고, 무의촌진료를 다니고, 의료혜택을 못 받는 이들을 위해 청십자의료보험 등을 조직해 사회안전망을 구축했다. 간암 권위자 등의 의학적 계관이나 의학발전공로자로서의 수상은 “쑥스러워서…”라며 한사코 손사래 쳤다. 환자와 그 가족들은 ‘병원에 간다’고 말하기보다 “장 박사에게 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를 성자라 불렀다.

그는 또 교회 장로(부산 산정현교회)로서 한국교회가 소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에 늘 가슴 아파했다. 거창고 설립자 전영창(1916~76년) 목사와 기독교교육운동 등 다양한 신앙운동을 펼친 이유다.

3병동 옥탑방은 큰 병원 명의가 누릴 수 있는 혜택과 무관하다. 옥탑방 옆 기계실에서 새어 나오는 굉음에 편치 않을 잠자리였을 것이다. 책상 책장 장롱 침대 소파…, 단출했다. 장기려는 “나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안고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해”라며 염려하는 이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그는 이 옥탑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귀히 여겼다. 북에 있는 아내와의 온전한 교감이었다. 그는 스테디셀러 ‘부생육기’ 저자 송복과 같이 아내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살았다. 1983년 아내와 자녀들이 평북 강계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그의 기도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내 눈동자요 손과 발이었다.”

1971년 한 기도모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장기려는 아내 김봉숙을 경성의전 졸업 무렵 교회에서 처음 보았다.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었다. 의사 김하식 딸이었다.

그들은 1932년 4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혼했다. 조선인 의사가 귀한 때라 언론에 소개될 만큼 화제였다. “동정을 결혼 후 이틀 동안 더 유지했다”고 고백한 에피소드는 장기려의 순결함 순수함 솔직함을 드러내는 신앙인의 면모이기도 했다.

그는 1982년 6월 ‘만남’이란 주제의 신앙 강연에서 아내 김봉숙을 자신에게 깊이 영향을 끼친 현실 인물 셋 가운데 으뜸으로 꼽았다. 부잣집 딸 김봉숙은 가세가 기운 집에 시집와 콩나물 외상값과 삯바느질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1941년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일할 때 사면초가에 몰려(사택에서 쫓겨나는) 어려울 때 아내는 성도 아니 내고 또 그것을(사택 비우라는 순경의 윽박지름)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으며 다만 하나님에게 판단해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아내가 절대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병원 옥탑방서 가족 그리워하며 살아

장기려는 이 약속을 지켰다. 월남 후 병원 사택까지 쳐들어오는 여인도 있었고 돈 많은 미국 교포의 청혼도 있었으나 아내가 살아있을 것이란 확신을 기도 속에서 응답 받았다. “(나라고) 순간순간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라고 했으나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의 마음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았다.

1985년. 전두환 정부로부터 이북에 다녀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특혜를 누리면서까지 다녀오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장기려에게 독재정부의 제안이 먹힐 리 없다. 장기려는 “나는 매일 같이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는 사람이오”라고 에둘렀다. 다만 미국에 있는 조카 등을 통해 서신이 오갔다. 이북 아내의 첫 문장은 이랬다.

“기도 속에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는 끝내 아내를 만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유일하게 같이 월남했던 둘째 아들 장가용(1935~2008년·의사) 박사가 2000년 8월 17일 50년 만에 어머니 김봉숙을 평양에서 만나 아버지의 소식을 전했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사랑 받지 못한다고 후회하지 말라.” 성자가 된 의사의 말이다.

장기려 박사 연보

·1911년 평북 용천 출생
·1928년 개성 송도고보 졸업
·1932년 경성의전 졸업·김봉숙과 결혼
·1932~38년 경성의전 외과 조수
·1940년 평양연합기독병원 과장 부임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구류
·1944년 신사참배 반대 가정예배
·1945년 평양도립병원장 취임
·1950년 차남 가용과 월남
·1951년 부산 복음진료소 시작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조합장
·1969년 3선개헌 반대 서명
·1979년 라몬 막사이사이상 수상
·1981년 부산 산정현교회 장로 은퇴
·1985년 고신대복음병원 옥탑방 이사
·1991년 북한 아내와 자녀 편지 받음
·1995년 12월 25일 별세

부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