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큰 배움, 공감과 공존

입력 2018-12-13 00:01

한 대학 채플에서 특강을 하며 겪은 일이다. 채플은 강의보다 분위기를 집중시키기가 훨씬 더 어렵다. 참여 학생 다수가 비기독교인인 상황에서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해야하니 그럴 만도 하다. 그날도 이런 부담을 가지고 강단에 올랐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 버렸다. 앞줄에 앉은 한 학생이 내가 한 마디를 하면 두 마디로 응수를 하는 것이었다. 정서 장애를 가진 듯 보였다. ‘난 전문가야. 흔들리면 안 돼.’ 속으로 마음을 다잡고 제법 여유롭게 응수도 하며 강의를 진행해갔지만, 당황스러웠다. ‘곧 스태프가 와서 조용히 시키겠지. 아니면 달래서 데리고 나갈 거야.’

그러나 채플 내내 그 학생을 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무리 무렵엔 내심 화까지 났다.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으나 돌아오는 길에도 한동안은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거다. 그 학생이 계속 ‘방해’를 하고 있었음에도 다른 구성원들이 나무라거나 얕잡아보는 시선으로 응시하지 않았다는 거다. 모두가 ‘자연’스러웠다. 마치 다양한 모양과 색깔, 향기를 가진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듯이. 그러고 보니 그 공간에서 안절부절 하며 이질적인 느낌으로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나였다.

순간 ‘아차’ 싶었다. 교회의 이름은 “서로가 함께(kai allelon)”라고, 강단에 설 때마다 공감과 공존의 가치를 강조했던 나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가 교회의 핵심 원리로 제시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지칭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이었다고 한다.

평소 교회론적 공동체를 강조하는 나도 매우 공감하는 키워드라서 자주 사용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말한 공감과 공존은 엇비슷한 능력과 환경, 코드가 맞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만드는 ‘라이프 스타일’ 정도였었나 보다. 돌이켜보니 ‘수학능력’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모인 비교적 동질적인 학습공동체 안에서 수십 년을 보내면서, 내가 당황할 만큼 ‘다른’ 사람이 한 공간 안에 공존하며 공감을 요청하는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공감과 공존이 얼마나 살 떨리는 긴장과 갈등, 치열한 대면과 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낯선 대학 낯선 만남을 통해 경험했던 거다. 그리고 이 경험은 ‘대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생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고로 ‘큰 배움(大學)’이란 아카데믹해야 한다고, 나는 그리 믿고 있었다. 업데이트된 정보를 이성적으로 성찰하고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어야 그게 비로소 ‘대학다운’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나의 지식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에 불편했던 것이겠지. 그러나 돌아온 탕자보다 큰아들에게, 나사로보다 부자에게, 오후 5시에 참여한 노동자보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들에게 깨달음을 촉구하셨던 예수의 메시지는 ‘큰 배움’의 다른 차원을 전한다. 탕자가, 나사로가, 한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은 노동자가 ‘가장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 하지만 큰아들이, 부자가, 능력 있고 건강해서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서 효용가치를 인정받았던 노동자가 받아들이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어느덧 직업교육의 장이 되어버리고, 그나마도 제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인공지능 기계들의 도래와 함께 금세 대체되어버릴 도구적 지식들을 수동적으로 학습하는 대학 현실 앞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다시 물어야할 것 같다. 무엇이 ‘큰 배움’인지, 그리고 이를 배우기 위해 어떤 ‘다름’들을 우리 공동체 안으로 불러와야 하는지를.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약력=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졸업, 미국 보스턴 대학교 신학박사(Th.D).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