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달을 서술할 때 많이 쓰는 수식어는 ‘벌써’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12월이 한 해를 끝맺는 시간의 단위가 아니라 ‘겨울의 가장 깊숙한 곳’이라는 공간적 이미지가 있습니다. 내 몸은 산업사회, 그것도 전위적인 후기 산업사회를 살고 있지만 내 정신은 여전히 농경문화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양력이 아닌 음력으로 시간과 계절을 셈하니 음력 12월은 겨울의 가장 깊숙한 곳입니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겨울은 휴식기입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쉼없이 노동에 투신했던 몸들이 나른한 휴식기를 보내는 때입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누군가의 사랑채로 마실을 가고 삼삼오오 모여 민화투를 치거나 입담을 늘어놓는 것으로 소일을 하게 됩니다. 또 겨울밤은 길고 길어서 그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할머니들의 마실이 이어지는 계절입니다.
나의 할머니는 스물여덟에 청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감 없는 과부 집에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들어 긴긴 밤을 입담으로 짓물렸습니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던 마을에서 할머니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놀이는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은 발 없는 귀신 얘기와 호랭이 흘끔 담 넘어가는 얘기, 굴뚝새 담배 무는 얘기, 초가지붕에 새장가 든 묵은 구렁이 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솜털같이 하얀 눈이 고무신 뒤꿈치에 까맣게 쌓이는 밤, 이야기에 파묻혀 가물가물 잠이 들었습니다.
깊이 잠든 밤에 이야기들은 내 몸에 졸졸졸 흘러들어와 한 그루의 꿈이 되었습니다. 내 몸에는 눈밭을 헤치는 노루와 담배 먹은 굴뚝새와 탱자나무를 흔드는 바람과 곰방대를 문 할아버지의 잔기침이 들어와 있습니다. 눈송이가 온 세상을 덮는 까만 밤, 어두운 골목 같이 알 수 없는 인생의 일들이 내 안에 길을 내고 이리저리 싸돌아다닙니다. 나는 수많은 이야기 중의 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이야기됨으로써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기억에 흰눈처럼 쌓인 이야기입니다. 언젠가는 녹아 없어지겠지요.
이야기는 하나의 기억입니다. 이야기는 우리 안에 저장된 데이터가 출력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이미지를 저장하기 위해서 그것을 인물과 사건, 배경 같은 이야기의 구성 요소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류하기 편하게 시간을 단위로 하여 각각의 다른 시간 파일에 저장합니다. 어렸을 때, 처녀 때, 새색시 때,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등과 같은 방법이나 몇 살 때, 혹은 그 해 여름 등과 같이 시간을 특정하여 파일을 만들고 데이터를 저장합니다. 그 데이터가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이란 어떤 정보를 저장한 데이터이고 이야기는 저장된 데이터를 불러오는 기술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데이터를 저장할 때 각기 다른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경험을 해도 각자의 이야기가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장된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불러오는 방식도 다릅니다. 주술관계가 다르고 어휘가 다르고 어조가 다릅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같은 파일명을 쓴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단위로 하는 파일명 말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번 도는 시간을 1년으로, 달이 지구를 한 번 도는 시간을 한 달로 하여 각각 1년과 한 달로 나눕니다. 그리고 한 달은 서른 날로 나누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으로 나눕니다. 이 시간들은 우리가 기억을 저장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해 분류한 파일명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 1장도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세계와 존재의 시작점을 시간으로 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세계 역사의 시작입니다. 역사는 이야기됨으로써 인간과 세계를 존립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이야기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이야기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억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시간을 ‘영원’이라고 합니다. 영원이란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입니다. 생성과 소멸이 없는 시간입니다. 기억되지 않고 이야기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100년이라는 시간 이전과 이후의 시간이며 나누고 분류할 수 없는 기억의 원형입니다. 그래서 영원의 시간에는 1월도 없고 12월도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이기 때문입니다.
<김선주 대전 길위의교회 목사>
[김선주의 작은 천국] 시간과 기억, 그리고 이야기
입력 2018-12-14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