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판결에서 이른바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을 양형 이유로 언급하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데이트 폭력은 법률용어가 아니어서 범죄의 종류나 유형이 정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일선 형사부 판사들도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데이트 폭력은 현재 또는 과거 연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신체적·정신적·성적 공격행위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폭언, 협박에서부터 폭행, 상해, 강간, 심지어 살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죄 형태로 발생한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 형사항소1부(부장판사 이대연)는 지난달 15일 상해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A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전형적 데이트 폭력으로 A씨가 피해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은 채 대상화하고 자신의 기준에 강제로 끼워 맞추려는 왜곡된 욕망과 집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A씨는 헤어진 여자 친구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 얼굴을 때려 상해를 입힌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는데, 법원이 범죄사실을 인정하며 ‘전형적 데이트 폭력’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A씨가 피해자와 여전히 교제 중이었으며 우발적으로 폭행했다는 취지로 주장하고 있지만 이를 유리한 양형요소로 고려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또 “A씨 주장은 피해자의 진술과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설령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폭행을 정당화할 아무런 근거도 되지 못한다”고 꾸짖었다.
인천지법 부천지원 정우혁 판사는 지난달 13일 여자 친구를 때려 코뼈를 다치게 한 혐의 등(상해)으로 기소된 B씨에게 징역 4개월을 선고했다. 정 판사는 판결에서 “이 사건과 같은 이른바 데이트 폭력 범행은 B씨와 특수한 관계에 있고 폭력에 제대로 저항하기 어려운 여성인 피해자를 상대로 한 범행으로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며 “재범의 가능성이 커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 기준에 ‘데이트 폭력’은 양형 요소로 반영돼 있진 않다. 그런데 직접 형사 재판을 하는 일선의 판사들이 데이트 폭력을 양형 이유로 거론하고 나선 것은 그만큼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또 데이트 폭력과 관련된 살인, 성폭력, 상해, 폭행 등 사건에서 범행 동기, 계획성, 상습성, 죄질 등을 더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한 지방법원 형사부 소속 A부장판사는 “데이트 폭력이란 말 자체가 법률적으로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형사법적 판단에서 그 자체만으로 엄벌한다거나 형을 가중하긴 어렵다”면서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언급되는 점은 일선의 판사들도 잘 알고 있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사안에 따라 혐의별로 살펴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법원의 B부장판사는 “예전에는 가까운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이라는 이유로 양형을 무겁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들여다볼수록 사건도 많고 문제도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데이트 폭력이 폭행, 감금, 성폭행, 불법 동영상 촬영 등 여러 범죄가 함께 엮인다는 점에서 죄질과 재범 위험성 면에서 양형을 더욱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안대용 기자 dandy@kmib.co.kr
판결문에 “데이트 폭력 엄벌해야”… 법원 인식 달라졌다
입력 2018-12-11 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