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남침로인지, 새로운 귀순 경로를 열어 준 건지 모르겠다.” 최근 일사천리로 진행된 남북의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파괴 작업을 바라본 한 군사전문가의 삐딱한 반응이다. 남북의 9·19 군사합의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반면 진보 진영은 실질적인 전쟁 위협을 해소한 합의라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9·19 군사합의는 남북의 전략과 이해관계가 일정 수준 교집합을 이뤘기 때문에 가능했다. 군사합의 이면에 담긴 양측의 전략과 득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핵화 끌어내려는 南… 경제건설에 집중하는 北
보수 진영의 가장 큰 우려는 북한의 비핵화에 실질적 진전이 없는데도 무리하게 안보 빗장을 풀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양측의 적대행위가 전면 중지된 최전방에서 우리 군사작전에 일정 수준의 제한 사항이 생겼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북도서 지역을 포함한 최전방 훈련을 후방에서 실시하게 됐으며 무인기 등 일부 정찰자산 운용도 할 수 없게 됐다. 군 고위 관계자는 14일 “일부 작전에 제한이 있어 보완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군사합의는 우리 정부가 불가피하게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 설명이다. 군사합의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남북관계 개선 과제였다는 얘기다. 남북이 정전협정에 따라 DMZ를 ‘진짜 비무장지대’로 만들고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군사적 완충구역을 둔다는 데 이견이 붙기는 힘들다. 또 군사적 긴장 완화는 북한에 현금이나 현물을 다량 지원하는 사업이 아니어서 대북 제재와 거리가 멀다. 이런 배경 속에 우리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기 위해 사실상의 남북 불가침 약속인 군사합의 카드를 꺼냈다.
북한은 아직 미국으로부터 비핵화 약속을 대가로 한 체제 보장 조치를 받아내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남측과의 군사합의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부담이 가중됐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새 전략노선으로 택한 북한이 여기에 투입할 자원 확보에 애를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시설 건립에 군을 대거 투입하는 북한 체제에서는 ‘군사적 긴장 완화=경제건설 동력 확보’일 수 있다.
군사적 긴장 완화는 북한도 부담?
군사합의가 북한이 마냥 달가워할 만한 카드는 아니었다. 북한도 협상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부담감을 내비쳤다. 그런 북한의 우려 중 하나가 최근 현실화됐다. 군사합의에 따라 북측 GP가 파괴된 지역으로 지난 1일 북한군 1명이 귀순한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귀순자가 소속돼 있던 북측 부대장은 엄청난 고초를 겪었을 것”이라며 “북한군 내부에서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를 반대하거나 상당 부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군사합의에 명시된 대로 DMZ 내 남북 GP 모두를 철거할 경우 북측의 경계태세에 허점이 생길 수 있다. 북측 GP는 대남 경계를 하면서 북측 인원의 탈북도 막아 왔는데 이런 감시시설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MDL 이남 2㎞ 지역에 일반전초(GOP) 경계망을 구축하고 있는 우리 군과 달리 북측은 GP 이외의 최전방 경계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대북 확성기 방송 등 대북 심리전이 사실상 중단된 가운데 북한군 귀순이 이어진다면 군사합의는 뜻하지 않은 암초에 부딪칠 수 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조치도 북한 측에 부담일 수 있다. 남북 군사협상에 참여했던 한 예비역 장교는 “북한은 오랜 기간 적국이던 미군과 유엔군사령부를 동일시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 유엔사와 머리를 맞대고 JSA 비무장화 논의를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북측은 군사합의 협상에서 ‘자주성’을 강조하며 남북만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다만 남·북·유엔사 3자 협의체 회의에서는 이런 말을 공식적으로 꺼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유엔사는 빠지라는 식의 주장은 오래된 북한의 레토릭”이라며 “북측이 대놓고 거부할 수는 없지만 남북 군 당국 간 대화에서 불만을 털어놓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 경우는 있었다”고 전했다.
군사합의는 불가역적인가
현재 추진 중인 9·19 군사합의는 대부분 내년으로 이어진다. 육상·해상·공중에서의 적대행위 중지 합의는 변함없이 이행되고, 강원도 철원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공동유해발굴이 내년 4월부터 본격 착수된다. 화살머리고지에 이어 인근 백마고지 지역에서도 지뢰제거와 유해공동발굴이 이뤄질 예정이다. 또 내년 3~4월에는 남북 민간 선박이 한강 하구 공동이용 수역을 이용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변수는 북·미 비핵화 협상이다. 이 협상과 맞물려 유예 또는 축소 실시로 가닥을 잡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은 협상 결과에 따라 재개될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은 군사합의를 위반한 것이라며 다시 군사적 긴장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DMZ 관할권을 가진 유엔사에 대한 북한의 거부 반응도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북한이 ‘JSA 관리권’을 남북만이 가져야 한다며 ‘유엔사 배제’를 요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북한이 모든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유리그릇 다루듯이 하라”고 했던 것처럼 군사합의 역시 언제 다시 깨질지 모른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지난해 11월 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 15형’을 시험발사한 뒤 1년여간 유지된 북한의 군사 도발 중지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미지수다. 북한의 군사 도발이 재개된다면 그동안 어렵게 쌓아올린 합의는 하루아침에 백지장이 되고 우리 군도 대응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군 고위 관계자는 “극과 극의 상황에 대한 대비태세를 갖춰야 하는 상당히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9·19 군사합의 득실 따져보니 남북 모두 윈윈, 긴장완화와 제재 피한 묘수
입력 2018-12-15 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