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조선 기대던 중소기업 와르르… 울산경제 붕괴 공포

입력 2018-12-11 04:03

글 싣는 순서

① 주저앉는 지역경제
② 번지는 불황의 불길
③ ‘무용지물’ 구조조정
④ 위기 극복의 길
⑤ 변신을 두려워 말라

제조업을 중심에 두고 경기를 이끄는 지역경제의 성장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자동차·조선 등 주력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여기에 기대 성장해 왔던 서비스업, 부동산시장까지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중이다.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흩어진다. 과거 한국의 생산기지 역할을 했던 지역들은 ‘공동화 현상’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한국판 ‘러스트 벨트’(Rust Belt·쇠락한 공장지대)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다. 제조업 의존도가 높은 각 지역의 경기침체 상황, 원인, 해결책 등을 5회에 걸쳐 짚어본다.

19년째 울산 동구 항만에서 하역업에 종사하는 A씨(41)는 요즘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다. 수출하는 신차를 선박에 싣는 일을 하는데 지난해부터 현대·기아차 수출물량이 뚝뚝 줄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 달에 24~25일가량 일감이 있었지만, 최근엔 일 있는 날이 보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나마도 약 90명으로 이뤄진 팀당 하역물량이 4000대 밑으로 떨어지면서 퇴근시간이 빨라졌다. 울산 달동의 한 자재업체에서 만난 A씨는 10일 “경기가 좋을 때엔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5000~5500대를 배에 올렸다. 지금은 1000대도 못 올리는 날이 많다”고 했다.

일감이 줄어든 만큼 지갑은 얇아졌다. 그는 “월수입이 20% 넘게 줄었다. 동료들은 대리기사, 막노동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번다. 나도 지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전했다.

A씨 한숨은 울산 지역경제의 우울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현대·기아차가 겪는 어려움은 울산을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다. 현대차의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은 288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6%나 감소했다. 이는 곧장 하청업체의 고사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 2차 협력업체를 운영하는 B씨(65)는 “일감이 40% 정도 줄었다. 하청업체끼리 경쟁이 심해져 납품단가는 더 떨어지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비용은 올랐다. 문을 닫거나 사람을 줄여서 공장 일부만 가동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울산 경제의 또 다른 엔진인 조선업은 더 일찍 무너졌다. 2016년 6월 1160개에 이르던 조선업체는 본격적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지난해 말 918개사로 쪼그라들었다. 같은 기간 조선업 근로자 수는 5만7618명에서 3만6763명으로 반 토막 났다. 선박용 항해통신장비를 만들어 납품하는 M업체 대표 C씨(46·여)는 “2015년 매출이 75억원이었는데, 올해는 절반”이라며 “외환위기 때는 환율 때문에 고생했지만 일감이 많아 재기를 노릴 수 있었다. 일감 자체가 줄어든 지금이 그때보다 더 힘들다”고 했다.

주력 엔진이 식으면서 울산 내 주요 산업단지엔 찬바람만 분다. 12개 업체가 입주한 매곡 2차산업단지에 가동업체는 절반에 그친다. 현재 조성 중인 KCC울산산업단지엔 32개 업체가 입주키로 했는데, 실제 입주해 공장을 돌리는 업체는 16개에 그친다. 울산중소기업협회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산업단지 부지를 분양받는 게 ‘로또 당첨’만큼 어렵다고 했다. 지금은 분양을 받고도 공장 지을 엄두를 못 낸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제조업 몸살’에 울산이 비어가고 있다.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근로자들은 떠난다. 조선업체들이 몰려 있는 울산 동구의 인구는 1995년 19만1632명에서 올해 7월 16만6124명으로 감소했다. 지난해 울산 전체 인구는 전년 대비 0.8% 줄어 17개 광역시·도 중 감소폭이 가장 컸다. 불황의 그늘은 에어컨 설치업자들이 먼저 느낀다. 11년째 에어컨 설치업을 해온 D씨(39)는 “일감이 3분의 1 정도 줄었다. 주택 이사 일감도 줄고 공장 신·증축 일감도 거의 없다. 울산이 비어간다는 얘기”라고 했다.

특히 제조업의 위기는 서비스업까지 집어삼키고 있다. 올해 3분기 울산의 서비스생산지수(전년 동기 대비)는 도소매업에서 2.3%, 숙박음식점업에서 3.0% 줄었다. 울산 남구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E씨(37)는 “불경기에 손님이 확실히 줄고 있다. 무리해서 지점을 두 개 더 냈는데, 대출 이자 갚기도 힘들다.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울산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울산 동구에서만 2016년 말부터 올해 7월까지 약 480개 음식점이 문을 닫았다.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많으니 부동산시장은 바닥을 친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울산의 지난달 주택매매가격지수(2017년 11월을 100으로 산정)는 93.8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큰 낙폭이다. 조선·자동차 업체가 몰려 있는 동구(90.4)와 북구(89.6)에 타격이 집중됐다. 외국인 근로자 등을 겨냥해 지어진 원룸은 빈방으로 변하고 있다. 2~3년 전까지 60만원 수준이던 원룸 월세는 최근 10만원대로 떨어졌다. 주택산업연구원 김덕례 주택연구실장은 “기본적으로 부동산 가격은 수급에 따른 흐름이 있는데, 이 흐름보다 심하게 낮다면 해당 지역 산업에 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다. 울산이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주력 제조업 침체→중소 협력업체 고사→일자리·인구 감소→건설·서비스업 침체로 이어지는 ‘지역경제 붕괴 사이클’이 작동하는 셈이다. 이는 울산뿐만 아니라 경남 거제, 전남 곡성 등 주력 제조업이 흔들리는 지역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제는 악순환을 끊을 묘수가 없다는 것이다. 울산상의 관계자는 “지역 주력산업의 침체는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구조적 문제라서 반등 계기를 찾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보호무역주의 강화, 중국 제조업 추격, 주요 대기업의 생산기지 해외이전 등 안팎 여건도 좋지 않다.

울산=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