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호 (3) “종호는 세계적 성악가로 자랄 수 있는 아이”

입력 2018-12-03 00:17 수정 2018-12-04 10:06
1977년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 합창단에서 솔리스트로 공연 중인 박종호 장로.

중학교에 진학하기 몇 해 전에 중학입시제도가 시험제에서 추첨제로 바뀌었다. 후암동 평지의 용산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정작 내게 배정된 학교는 해방촌 꼭대기의 숭실중학교였다.

초등학생 시절 친구 따라 성당에서 성만찬 몇 번 구경한 게 전부였던 나는 숭실중에서 제대로 된 개신교 예배를 경험했다. 미션스쿨인 숭실중은 일주일에 16번 예배 및 기도모임을 가졌다. 그때는 선생님이 시키니 멋모르고 기도했지만 이런 시간들이 모여 신앙의 기초가 쌓인 것 같다.

숭실중은 음악적 소질을 계발토록 기회를 제공한 곳이었다. 전통적으로 합창반이 유명했는데 나는 2학년 때 단원으로 합류했다. 곧 학급 지휘자를 맡았고 학교 ‘80주년 기념 음악회’ 때는 솔리스트로 나섰다. 이듬해엔 동양방송(TBC)이 주최하는 전국 학생음악 콩쿠르에 나가 입상했다.



중학교 진학 전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건 한국방송공사(KBS)가 주최한 ‘누가 누가 잘하나’란 전국 노래 경연대회에서 입상을 하면서 알았다. 당시 심사평은 이랬다. “KBS가 학생 노래 경연대회를 시작한 이래 이렇게 소리가 크고 노래를 멋지게 한 남학생은 처음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노래로 후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음악을 전공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는 명문 A예고의 음악부장이 학교로 와 나를 찾았다. TBC가 주최한 콩쿠르에서 심사를 맡았던 분이었다. 그분은 대뜸 “너를 스카우트하러 왔다. 너희 음악 선생님과 같이 의논해보자”고 말했다. ‘운동선수도 아닌 내게 스카우트 제안이 오다니.’ 심장이 쿵쿵 뛰며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크게 반대했다. 서울대 법대에 가서 검사가 될 애를 노래나 부르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스카우트 제안을 한 교사에게 “나도 교사를 해봤지만 노래 잘해봤자 학교에서 교편 잡는 것 외엔 할 일이 없다. 얘가 세계적인 음악가가 될 수 있는 수준이냐”고 물었다. 그분은 그 자리에서 “종호라면 세계적 성악가로 자랄 수 있는 아이”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이내 수긍하고 예고 진학을 허락했다.

당시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한 학생은 내가 유일했다. 그때 성악과 동기 중 유일한 여성 전액장학생이 성악가 조수미였는데 스카우트된 건 아니었다.

화려하게 진학했지만 1979년 친구들과 벌인 시험지 도난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걸려 결국 중도 퇴학당했다. 내가 직접 시험지를 훔치지는 않았다. 당시 교실에서 자며 등사실에 몰래 들어간 친구를 기다렸는데 객기를 부려 주동자라 밝힌 게 화근이었다. 이튿날 바로 퇴학 처분이 났는데 이처럼 신속하게 처리된 건 보결로 대기하는 인원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덕분에 배문고 야간에 겨우 들어가 고교 과정을 마치고 음대 입시를 준비했다. ‘불미스런 일이 있었지만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대 입시에 더 치열하고 간절히 매달렸다.

퇴학한 지 33년이 흐른 2012년에야 나는 그간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A예고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이제야 졸업장을 받다니 웃기기도 했다. 퇴학 당시는 수치스런 기억이었지만 그 상처로 대학 입시에 힘을 기울였던 걸 생각하면 아주 아픈 추억은 아닌 것 같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