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비리) 사태가 처음 터졌을 때는 나랑 원장한테 학부모들이 ‘미친 X’이라며 욕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불안하다고 매일 전화해요. 그래도 아직 정해진 거 없다고 하고 일부러 원생 안 받아.”
경기도 안산의 한 사립유치원 설립자 A씨(58)는 2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 주최 집회에서 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원아를 받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차라리 ‘박용진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이 통과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유치원들이 다 폐원해 대혼란이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국 사립유치원 원장과 설립자들이 사립유치원 개혁 입법을 반대하며 태세 전환에 나섰다. 유치원 비리 사태로 학부모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여 눈물로 사죄한 지 불과 한 달 반 만이다. 29일 대규모 궐기대회를 연 이들은 “우리의 요구가 무시되고 박용진 악법이 고쳐지지 않으면 사립유치원 모두는 폐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엄포까지 놨다. 사립유치원 예산 시스템 개혁을 둘러싼 정치권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유치원은 아이를 볼모로 기세를 올리고 학부모는 속앓이를 하고 있다.
한유총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전국 사립유치원 교육자·학부모 총궐기대회’를 열고 “박용진 3법은 악법”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에는 경찰 추산 3000명, 한유총 추산 1만5000명이 참석했다.
한유총은 공문으로 유치원당 2명 이상씩 집회에 참석하라며 인원을 할당했다. 집회에서 만난 조모(17)양은 “경기도 수원에서 유치원을 하는 이모가 오라고 해 어머니와 왔다”며 “학교에는 현장학습 간다고 했다. 저 사안(박용진 3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경북 구미에서 왔다는 한 20대 남성은 “(사립유치원) 원장님 아들”이라며 친구와 동행했다고 말했다.
비리 유치원 사태는 국민적 공분을 샀고, 여야 모두 한목소리로 개혁의 필요성을 외쳐 발 빠른 대처가 예상됐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이 졸속 해결 우려가 있다며 자체 안을 내기로 하면서 논의가 늦춰졌다. 한국당이 아직 자체 안을 마련하지 않아 논의가 계속 중단된 상태다. 사립유치원은 내년 예산안이 거의 확정된 데다 입학철이어서 학부모의 거센 반발을 피할 수 있게 됐다.
한 달 반 만에 태도가 바뀐 사립유치원 원장들의 모습에 학부모들은 분노하면서도 무력감을 토로했다. 수도권의 한 사립유치원 학부모 이모(29)씨는 “처음에는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던 한유총이 몇 달이나 지났다고 서울 한복판에서 시위까지 한다는 사실이 정말 어이없고 화가 난다”면서 “싹싹 빌어도 부족할 판에 뭐가 그리 당당한지 모르겠다. 뻔뻔한 모습에 분노가 치밀지만 학부모 입장에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한유총 이덕선 비대위원장이 이사장인 경기도 화성 동탄 리더스유치원 학부모 90여명은 항의 차원에서 교육비 납부 거부를 선언했다.
시민사회 단체들은 정치권의 책임을 성토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김남희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서는 교육부의 대처가 빠른 편이었고 문제 해결을 위한 ‘박용진 3법’도 국회에 곧바로 올라왔지만 정치권에서 논의가 막혔다”며 “한국당은 법안 통과를 가로막은 것도 모자라 오히려 한유총의 주장을 수용한 법안까지 내놓는 모양새”라고 비판했다.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은 “국회가 꾸물대는 동안 유아교육은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학부모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며 “유아교육 정상화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효석 권중혁 기자 promene@kmib.co.kr
한가한 국회, 뻔뻔한 한유총… 국민만 속터진다
입력 2018-11-29 18:08 수정 2018-11-29 2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