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은의 씨네-레마] 대형 마켓에서 ‘파도 소리’를 듣다

입력 2018-11-30 18:41
주인공 크리스티안(오른쪽)이 동료 마리온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장면. M&M 인터내셔널 제공
임세은 영화평론가
거대한 창고형 마켓에서 클래식 명곡,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흐른다. 상품을 운반하는 지게차가 왈츠를 추듯 우아하게 통로를 오간다. 삭막하고 거대한 현대인의 소비 공간은 단번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곳은 오늘부터 신입 사원 크리스티안이 일하게 될 직장이다.

유난히 말수가 적은 청년 크리스티안은 햇빛이 들지 않는 마켓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간다. 혼자 사는 그에게 집은 ‘회사’라는 집으로 다시 가기 위해 깊은 잠을 자는 공간일 뿐이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고된 일상이지만 그의 주위에는 차분하고 끈기 있게 일을 가르쳐주는 선임 브루노와 옆 진열대 사탕 코너에서 일하는 마리온이 있다. 크리스티안은 마트 진열대 사이로 마리안을 처음 본 순간 파도 소리를 듣는다.

영화 ‘인 디 아일(In the Aisles)’은 ‘통로에서’라는 뜻이다. 이야기는 구동독 라이프치히의 고속도로와 주차장 사이에 있는 마트 안에서 펼쳐진다. 원작자 클레멘스 마이어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공사장 노동자, 경비원 등을 경험한 블루칼라 출신의 소설가이다. 남다른 이력으로 젊은 나이에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등단했다.

영화를 연출한 토마스 스터버는 구동독 라이프치히 출신의 신세대 감독이다. 그는 마이어의 소설을 본 뒤 “한 외로운 청년이 밤에 대형 마트의 통로에서 지게차를 몰고 가는 그림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며 연출 의도를 밝혔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에큐메니컬 심사위원상(기독교 관련 심사위원으로 구성된 상)을 받았다.

영화가 그려내는 대형 마켓 안의 풍경은 현대인의 삶과 비슷해 보인다. 대형 마트는 삭막하고 획일적인 공간이지만 때론 매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현대인들에게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공간이다. 마트 안에 진열된 다양하고 화려한 상품은 사람들의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화는 좀처럼 대형 마켓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사랑에 빠진다. 브루노는 15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동료와 체스를 즐긴다. 하지만 일로 맺어진 관계에는 한계가 있다. 오랜 세월 매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서로가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른다. 일과 가운데 허락된 잠깐의 휴식 시간, 그 순간만이 이들의 유일한 즐거움이고 행복이다.

이들은 콘크리트 벽과 기계음을 통과해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지게차가 내려오는 소리에서 파도 소리를 듣고, 물고기가 빽빽하게 들어간 수조를 바다라고 부른다. 휴양지풍경이 있는 벽지를 배경으로 한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신다. 한겨울에는 전기난로를 켜고 바닷가에서 일광욕을 하듯 옷을 벗는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스페인의 섬 이비사를 상상한다. 여름휴가를 즐길 여유가 없는 일상의 피로와 고단함에 눌려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작은 행복이 애잔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주어진 삶의 조건이 어떠하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무력하지만 기쁨으로 매일 주어진 생명을 또 살아낼 것이다. 슬픔과 아픔을 이겨내고 또 하루를 담담하게 맞는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런 믿음의 힘은 어디서 올까. 무엇보다 겸손한 자세에서 나올 것이다. 자신의 비참함과 무력함을 온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때 비로소 갖춰지는 자세다. 그리고 신의 은총이 신비하게 부어진다. 비참함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힘이 생명수처럼 흐른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