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교회서 성장한 혁명음악 작곡가, 중국의 별 되다

입력 2018-11-30 18:21 수정 2018-11-30 19:12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 정율성 생가(오른쪽 담 안)를 방문한 광주대학교 학생들이 친구들을 안고 포즈를 취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공주놀이 사진찍기’이다. 멀리 정율성이 다녔던 광주양림교회 첨탑이 보인다. 당시 교회 일대는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6·25전쟁 후 중국에서 음악활동을 하던 때의 정율성, 광주양림교회와 교인들의 1930년대 사진, 광주양림교회 최학휴 목사가 교회 역사를 설명하는 모습, 광주양림교회 사거리 정율성 흉상.
양림교회와 이강하미술관이 보이는 3·1만세운동길. 고 이강하 화백의 아내(왼쪽)와 딸 가족이 길에 얽힌 근현대사를 설명했다.
◆ 연보

·1928년 광주 숭일학교 졸업
·1929년 전주 신흥학교 입학
·1933년 신흥학교에서 세례 받음
·1933년 항일운동 위해 중국 망명
·1939년 팔로군행진곡 작곡(훗날 중국 인민해방군가)
·1941∼44년 항일운동
·1947년 북한 인민군 협주단장
·1951년 이후 중국서 음악활동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수난

광주광역시 남구 3·1만세운동길에 114년 전통의 광주양림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1892년 조선 선교에 나선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7인이 전주·군산·목포선교부를 잇달아 열었다. 당시 전남 중심 도시 나주 읍성에도 선교부를 개설하려 했으나 유림 등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미 선교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나주 외곽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군 효천면 방림리(현 광주광역시 양림동) 양림산 기슭에 양림교회를 세우는데, 이것이 지금의 ‘양림문화마을’의 뿌리가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마을을 ‘선교사타운’으로 부른다. 근대도시 광주는 바로 이 양림동을 중심으로 확장되고 발전돼 왔다.

지난 21일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광주양림교회(최학휴 목사) 앞 사거리. 북쪽 방향은 ‘정율성로’이고 남쪽은 ‘오방로’이다.

정율성은 양림동 태생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음악가이다. 그가 작곡한 ‘팔로군대합창’ 중 ‘팔로군행진곡’이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비준 받았다. 때문에 정율성은 한국 사람보다 중국인이 더 추앙하는 인물이 됐다. 그는 1933년 항일운동하던 형들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원이 됐다. 항일전투에서 아군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 해방가 등을 작곡했다. 루쉰예술학교 음악학부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중화권 사람들 감성 일깨운 한국인 음악가

정율성과 그 형제들의 항일운동은 주목받지 못했다. 해방 후 그가 중국과 북한에서 음악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중 수교 등을 계기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중화권 사람들의 감성을 일깨운 한국인 음악가 정율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정율성로 남쪽 끝, 즉 기장 광주양림교회 아래에 자리한 정율성 흉상이 시민의 발길을 잡는다. 흉상 뒤편 아파트 벽면에는 그의 음악적 연보와 악보를 새긴 ‘정율성거리전시관’이 조성돼 있다.

정율성로를 남쪽 방향으로 이어 받는 오방로는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최흥종(1880∼1966)의 호를 딴 거리다. 한국 최초의 나환자(한센인) 수용시설 광주나병원 등을 건립한 그의 박애정신을 두고 사람들은 ‘빈민선교의 선구자’라고 칭했다.

이 두 사람은 조카와 큰 외삼촌 간이다. 또한 정율성의 둘째 외삼촌 최영욱(1891∼1950년 추정)은 의사이자 정치가, 언론인으로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체포돼 처형당했다. 최영욱의 부인, 정율성의 작은 외숙모는 정신여고 교장 등을 역임한 기독교육자 김필례(1891∼1983)이다. 김필례의 오빠와 언니가 각기 독립운동가 김필순(1880∼1922·의사) 김순애(1889∼1976)이다. 김순애의 남편은 독립운동가 김규식(1881∼1950·정치가), 이들의 조카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기독교육자)이다.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다. 광주 기독운동가 홍인화(원천교회) 권사는 “황해도 출신 김필례가와 최영욱가의 혼인은 호남선교의 지형을 이뤘고 이것이 오늘날 호남 통일운동의 배경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음악가 정율성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간에 그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하다. 국제정세와 이념의 온도차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임에 분명하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어찌됐든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지 않았다면, 분단이 없었다면 항일혁명가 출신 음악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율성은 수세(水洗)한 청년이었다. 그는 미션스쿨 전주 신흥학교(현 전주 신흥중·고 및 예수대 전신) 3학년 때 세례를 받았다. 학교 생활기록부에 ‘수세’라는 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선교사들이 세운 서구식 근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기독교교육 바탕 아래 배출된 이들은 이승만 김구 여운형 이회영 등과 같이 정치적 노선을 걷기도 하고 의사 장기려와 같은 성자가 되기도 했으며 한경직 문익환과 같은 목회자가 되기도 했다. 믿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퇴보하고, 믿음을 버리기도 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정율성은 적어도 20세 전까지 신앙 안에서 성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가계도(도표 참조)나 생활환경(지도 참조)을 두고 볼 때 기독교적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정해업은 1910년대 수피아여학교(현 광주 수피아여중·고) 교사였다. 누나 정봉은 역시 수피아여학교 음악교사였다. 또 광주 최초의 세례교인이자 한국인 목사였던 최흥종도 이 학교 교사였다. 최흥종은 20대까지 ‘최망치’로 불리던 악명 높은 건달이었다. 그는 1904년쯤 유진 벨(1868∼1925) 선교사를 만나 회심하고 첫 신자가 됐다. 따라서 정해업이 최흥종의 영향으로 교인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1925년 1월 7일자 ‘기독신보’에 따르면 정해업은 양림교회 건축헌금으로 20원을 낸 것에서 추측할 수 있듯 확실한 신앙인으로 보인다. 당시 모금총액이 2500원이었으니 20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1990년대까지도 정해업가의 독립운동 연구가 쉽지 않았다. 이념적 문제 때문이었다. 한데 1차 자료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이 교회였다. 정율성이 다녔던 양림교회, 미션스쿨 광주 숭일학교(현 숭일고교), 수피아여학교, 전주 신흥학교 등에 사료가 남아 생의 퍼즐을 맞춰 갈 수 있었다.

정율성은 숭일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질을 보였다. 그의 둘째 형이 남겨 놓은 만돌린을 연주하는 재주가 남달랐다. 외삼촌 최흥종 집에는 축음기가 있었다. 누나는 음악교사였다. 아버지는 ‘깽깽이’만 켜는 막내아들이 염려가 돼 이렇게 말했다.

‘음악도 쉬엄쉬엄해야지. 나라 빼앗긴 신세에 어찌 밤낮 노래만 부르겠느냐.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해라…외적과의 싸움에도 최후 결전에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승전고를 울렸단다. 한데 우리에겐 군가가 없구나.’(조선의용군 삶을 기록한 ‘중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서’ 중)

정율성은 신흥학교 시절 채플 시간을 통해 성가를 배웠고 이것이 성악과 작곡을 배우는 계기가 됐다. 당시 신흥학교는 합창단과 밴드부가 있었고 기독청년회 주관으로 서문밖교회(현 전주서문교회)에서 음악회가 자주 열려 정율성을 비롯한 학생들이 무대에 섰다. 1920년대에 작곡가 현제명이 그 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정율성은 신흥학교를 졸업하진 못했다. 1931년 아버지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광주로 내려왔고 항일운동을 하는 형들을 대신해 집안을 건사해야 했다. 그가 ‘작은 외삼촌 병원에서 주사 놓은 법을 배웠다’고 했는데 바로 이 무렵이었다.

외삼촌 최흥종 목사 등에게 깊은 영향 받아

현재 양림동 정율성 생가는 기장 측 교회에서 250m 지점에 있다. 그가 자란 집터는 교회에서 1㎞ 떨어져 있다. 두 곳 모두 광주시가 표지석을 세워 관리하고 있다.

정율성을 연구한 이정한 TV다큐멘터리 작가는 “김칠례라는 할머니가 기억하는 정율성은 ‘공부한다고 상해로 갔으며 그때 그의 형 정의은(의열단원)이 교회 청년 몇 명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증언하더라”고 채록했다.

‘정율성로’에는 요즘 가로등마다 현수막이 나부낀다. 광주시립오페라단 주관 ‘정율성오페라 망부운(望夫云)’ 공연이 오는 7∼8일 광주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열린다는 내용이다. ‘광주출신 중국3대 혁명음악 작곡가’라고 소개한다.

정율성로 일대 양림문화마을 골목 곳곳이 순례길이다. 한국의 대표적 기독교문화콘텐츠로 가꿔 놨다. 정율성의 신앙을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격동의 시대에 기독교 가치 속에서 성장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 광주 양림교회는 셋이다?

광주 선교사타운(양림문화마을)에 미 남장로회 광주선교부가 세운 첫 교회는 양림교회인데, 현재 이 교회는 세 개나 된다.

양림교회 원터는 기장 측 양림교회이고 나머지 둘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과 합동 측 교회다. 1950년대 장로회 분열에 따라 같은 이름의 장로교회가 양림동 안에 분립하면서 서로 정통성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뿌리가 같음을 인식하고 세 교회가 강단교류, 연합찬양제, 교류연합회 운영 등으로 연대하고 있다. 양림동 기독교역사투어를 다닐 때 자신이 본 유구한 전통의 양림교회는 이런 역사를 모르면 3분의 1만 본 것이 될 수 있다.

광주=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