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대 끊길’ 위기

입력 2018-11-26 04:00

최근 작가 조정래(75)가 쓴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기념하는 태백산맥문학관 개관 10주년 행사가 있었다. 대하소설은 역사 흐름 속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방대한 소설이다. ‘태백산맥’을 비롯해 ‘아리랑’ ‘한강’을 쓴 그가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한강’ 이후를 다룬 대하소설을 쓸 계획은 없는가?” 그러면 그는 으레 이렇게 답한다. “내가 대한민국 100년사를 소설로 썼으니 그 이후 시간은 다음 세대가 쓰리라 믿고 기다린다”고. 그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아리랑’, 해방 전후 공간을 무대로 ‘태백산맥’, 1960년 4·19혁명에서 80년 5·18민주화운동까지를 ‘한강’에 담았다. 89년 완간한 ‘태백산맥’이 850만부 팔린 것을 비롯해 세 작품은 지금까지 모두 1550만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가 바라는 대하소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 8월 김성동(71)이 ‘국수’ 6권을 완간했지만 조선 말을 배경으로 한 예인들 얘기다. 등단 50주년을 맞는 윤흥길(76)이 대하소설 ‘문신’을 낸다는 소식이 있지만 역시 일제강점기 한 가족의 애환을 담는다.

사실 소설은 전반적으로 짧아지는 추세다. 과거 장편이라고 하면 원고지 1200매 정도였는데, 요즘은 600매 안팎의 경장편이 대세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단편도 80매 이상에서 50∼60매로 짧아지고 20매 안팎의 초단편이 강세다. 걷는사람의 ‘짧아도 괜찮아’ 시리즈가 한 예다. 미메시스의 ‘테이크아웃’ 시리즈처럼 100쪽 안 되는 얇은 책도 많다.

문학평론가 강경석은 25일 “일제강점기, 6·25전쟁, 독재정권 등 격동기를 겪은 세대가 대하소설을 주로 생산하고 소비했는데, 지금 젊은 작가와 독자들은 그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면서 “문학의 생산과 소비도 각 세대에 맞는 형식이 있을 것이다. 지금 세대에게 대하소설 방식이 적극적으로 요청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 흐름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는 “80∼90년대 우리 사회는 ‘시간’, 즉 역사에 관심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대하소설이 각광받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공간’, 즉 현재의 자기 삶에 집중하는 문화가 강해지면서 짧은 이야기나 에세이를 더 선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양의 문예사조도 역사 발전을 토대로 한 리얼리즘 이후엔 개인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모더니즘이 일어났다. 우 교수의 진단은 베스트셀러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2000년대엔 ‘가시고기’ ‘연금술사’ ‘다빈치 코드’ 등과 같은 장편소설이 베스트셀러였는데 2010년대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인생수업’ ‘언어의 온도’ 등과 같은 에세이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대하소설이나 장편소설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문학평론가 강지희는 “2000년대 이후 대하소설 발표도 별로 없고, 문단의 주목도도 낮았다. 하지만 미국 드라마나 웹소설이 실시간으로 소비되는 분위기를 보면 강한 흡입력을 가진 방대한 콘텐츠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게 아니라 그에 부응할 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독자 수요는 있다는 것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을 발간하는 이진숙 해냄출판사 편집장도 “민주화운동기 이후 외환위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시간도 충분히 작품으로 가능한 ‘블루오션’이라고 보는데, 요즘 젊은 작가들이 여기에 큰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다른 측면의 대하소설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우 교수는 “역사는 순환한다. 지금이야 ‘욜로’ 트렌드나 짧은 콘텐츠가 인기지만 계속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며 “가령 수명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그러면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삶 이후는 무엇인가’ 등과 같이 ‘이후’를 묻게 되고 장편 서사나 역사 소설이 다시 유행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