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교회가 성북동의 분위기에 완전히 동화됐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건물 같았다. 성북동 초입에 있어 지역사회를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사역의 방향이 주민들을 향했다.
교회를 봉헌한 이듬해인 1986년 초 교회 뒷산에 올랐다. 이 동산은 2017년 10월 덕수오색길로 새롭게 태어나 교인들의 큰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엔 그냥 나지막한 동산이었다. 봄이면 온갖 꽃이 눈을 부시게 하고 가을이 되면 각양각색의 단풍이 눈을 즐겁게 하는 산이기도 하다. 그때는 길도 없어 만들어 가면서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 올라 고개를 들어 길 건너편 언덕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부촌이 펼쳐졌다. 지금도 그렇다. 그야말로 대궐들이었다. 교회 건너편이 흔히 말하는 ‘성북동 부촌’의 초입이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위태롭게 서 있는 민초들의 삶의 자리가 펼쳐졌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그 시절 성북동의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했다. 상반된 광경을 보며 항상 기도했다. “주님, 덕수교회의 사명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마을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세요. 그 일에 우리 교회를 사용해 주옵소서.”
기도를 하면 할수록 교회가 주민들과 호흡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출발은 유치원이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 한 젊은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급하게 내 옆을 지나간 일이 있었다. 처음엔 무심결에 지나쳤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들이 여럿 눈에 띄는 게 아닌가. 교회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혜화동에 있는 유치원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동네에 유치원이 없어 먼 곳까지 다닌다고도 했다.
86년 3월 10일 덕수유치원이 개원한 이유다. 마침 교회 창립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유치원은 명문 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지역의 어린이들이 모두 거쳐 간 곳으로 지금도 “나 덕수유치원 출신이야”는 말이 통용될 정도다.
유치원을 시작으로 교회는 다양한 사역에 참여했다. 89년 3월엔 사회봉사관 부지를 마련했고 그해 10월엔 덕수노인학교와 덕수공부방을 개설했다. 교회는 조용한 주택가에 웃음을 전하는 공동체로 자리 잡아 갔다.
사역을 확장해 나가던 90년 11월 23일 내 인생의 멘토인 최거덕 원로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을 지내신 최 목사님의 장례는 ‘총회장(葬)’으로 치러졌다. 가슴이 뚫린 듯 허전함이 밀려 왔다. 교인들도 최 목사님을 추억하며 그리워했다.
추모의 시간 중에도 사역은 이어졌다. 91년 11월 사회봉사관을 준공했다. 한 걸음 더 주민들에게 다가서는 계기가 됐고 92년엔 덕수어린이집을 개원했다. 이듬해엔 지역공동체생활교육원을 개원했고 주민들 사이에 소통을 위해 지역신문인 ‘성북골’도 창간했다. 성북동 사역의 초기, 덕수교회를 상징하는 시설 중 하나인 일관정을 만났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교회의 품으로 들어왔다.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