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19) 장로들 도움으로 순탄한 목회 중 개발 소문이…

입력 2018-11-20 00:06 수정 2018-11-20 09:01
덕수교회 교인들이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옛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교회는 1983년부터 조선일보와 이전 협상을 시작했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던 1964년부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이 바로 덕수교회였다. 그 세월이 13년이나 흘러 1977년이 됐다. 그동안 나는 교인에서 교육전도사와 전임전도사,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사가 됐다.

매 주일 설교했고 심방과 목회계획들을 세워 나갔다. 젊었기에 용감하고 과감했다. 장로님들은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셨다. 젊은 목사의 목회를 항상 지지해 주셨다. 오랜 세월 목회하면서 단 한 번도 당회 회의 중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덕수교회 당회는 화해와 화합의 공간이었다.

78년 1월부터 교육관 건축을 위한 헌금을 시작했다. 어렵게 건축헌금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성도들은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응답해 주셨다. 그렇게 모아진 헌금이 1억원이었다. 이듬해인 79년 9월 기공예배를 드렸다. 담임목사가 되자마자 시작했던 교육관 건축은 80년 4월 마무리 됐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이곳에선 교회학교 학생들과 대학생들의 예배와 모임이 끊이지 않고 열렸다. 젊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83년이 되자 동네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회 주변이 도시개발 구역으로 정해진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정동은 주택과 사무용 빌딩이 섞여 있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조용한 동네였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개발로 정동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건물은 교회와 이웃하고 있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정도다.

개발 소식은 교회에겐 악재였다. 교육관도 짓고 교인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회가 당장 철거될 처지에 놓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만 동네 구석구석에서 공사가 시작되면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게 분명해 보였다.

‘교회를 이전해야 하나. 이전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 재정도 충분하지 않은데….’ 교회를 바라보며 수없이 고민했다. 쉽게 답을 얻을 순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곳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조선일보입니다. 뵙고 상의 드릴 일이 있어 연락 드렸습니다.”



조선일보가 우리 교회에 무슨 볼 일이 있을까. 교회를 찾아온 직원은 놀라운 제안을 했다. 교회 자리에 신문사 사옥을 짓고 싶다는 게 아닌가. 교회 부지를 사겠다는 말이었다. 곧바로 장로님들께 알렸다. 장로님들이 온 동네를 다니며 수소문해보니 이미 교회와 담을 맞대고 있던 주택과 변호사 사무실로 쓰던 빌딩이 모두 조선일보에 매각된 뒤였다. 대충 보니 우리 교회가 사옥 예상 부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교회를 이전할 생각까지 하던 상황이라 신문사의 제안에 마음이 쏠렸다. 하지만 교회의 앞날이 걸린 일이니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최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협상에 임하기로 했다. 장로님들도 교회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 내자고 의기투합했다. 교회는 당시 국회의원과 기업 대표로 계셨던 장로님들과 함께 협상팀을 꾸렸다. 신문사 쪽에선 방상훈 당시 전무가 책임자로 정해졌다. 교회와 신문사 모두 각자의 운명이 걸린 협상에 나섰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