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18) 최거덕 목사의 내리사랑에 든든한 목회자로 세워져

입력 2018-11-19 00:10 수정 2018-11-19 09:02
손인웅 목사가 1980년 서울 중구에 있던 옛 덕수교회 정문에서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최거덕 목사님은 거장이셨다. 서울 묘동교회와 안동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하신 뒤 1946년 덕수교회를 개척하셨다. 그분의 별명은 ‘복덕방’이었다. 교인들이나 이웃교회 목사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면 그들은 어김없이 최 목사를 찾았다. 분쟁 당사자들이 모두 최 목사에게 상의를 하러 왔던 것이다. 최 목사는 자연스럽게 중재를 했고 화해를 이끌어 내셨다. 자신의 덕을 나누신 것이었다.

그 분의 너그러운 품에 내가 안긴 일이 있었다. 덕수교회 담임목사로 정해진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일이 바로 그 일이었다. 1972년 여름이었다. 고등부 아이들이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교외로 수련회를 떠났다. 그 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던 난 책임자로 동행했다. 수련회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아이들은 모닥불 놀이를 준비한다고 분주했고 난 숙소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이들이 눈물 범벅이 된 채로 방문을 벌컥 열었다. “목사님, 목사님…” 눈물 섞인 목소리가 내게 닿질 않았다. ‘큰 일이 났구나’ 싶었다. 마음을 다잡고 아이들이 이끄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 아이가 굵은 전선을 붙잡고 쓰러져 있었다. 감전이었다. 아이를 전선에서 떼어내기 위해 몸통을 안았던 기억까지 난다. 눈앞에서 큰 빛이 나고 정신을 잃었다. 여전히 전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아이를 빨리 떼어내야 한다며 다시 다가가는 걸 교사들이 몸을 던져 막았다고 했다. 그날 17살, 꽃다운 나이의 학생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교회에 보고를 했다. 최 목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경찰서에서 조사도 받았다. 교인들은 술렁거렸다. 하지만 담임목사님이 적극 나서셨다. 사고 당한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고 교인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날 불렀다. “손 목사. 한 달 휴가를 주겠네. 잘 치료받고 돌아오게.” 그 말을 듣고 교회를 나오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쓰러져 있던 아이 생각이 났다. 부족한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 같았다. 괴로웠다.

교회를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목사님. 사임하겠습니다. 제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쉬고 돌아오게. 수습은 내가 하겠네. 장로님들과도 상의가 끝났네.” 그리고는 날 안아주셨다.

교인들은 위로헌금을 모아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얼마의 기금을 조성해 그 학생 이름으로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모두 침묵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교회는 큰 아픔을 이겨내면서 성숙했다. 난 감전으로 심장과 머리를 다쳤다. 입원 중이었지만 유가족을 방문하러 몰래 병원을 빠져 나갔다. 진심으로 위로했다. 아이의 가족들은 도리어 날 위로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난 견고해졌다. 목사로서 첫 출발하던 해에 겪은 이 일이 일생동안 나를 든든히 세워줬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목사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 또 깊은 상처를 입은 교우가 있다면 진심으로 위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최 목사님의 사랑을 통해 ‘내리 사랑’의 힘을 체험했다. 35세 젊은 나에게 덕수교회 강단이 맡겨졌다. 두렵고 떨리던 순간 이 생각이 난 건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를 지키고 교인들을 목양하겠단 다짐이 아니었을까.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