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할 시간마저 빼앗긴 과로사 유족들

입력 2018-11-15 04:00

윤모(48)씨는 지난 5월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에 출석해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과로자살로 인정받아야 산업재해 승인을 받을 수 있기에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윤씨는 14일 “어떻게 동정을 받아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 과정이 모멸스러웠다”며 “질판위에서는 위축됐고, 이야기를 마치고 나올 땐 죽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생계를 유지할 다른 길이 없어 산재 승인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윤씨는 그러나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는 “내 태도가 약자처럼 보이지 않았는지, 혹은 회사 탓을 심하게 하며 너무 강하게 항변하지는 않았는지 수없이 자책했다”고 말했다.

과로사에 대한 입증 책임이 주로 유족들에게 부여되면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과로사 노동자 유족 사이에선 ‘질판위에 갈 때는 최대한 슬프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정보로 공유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인의 업무와 관련된 객관적 자료 접근이 상당부분 제한되는 불리한 환경이 이 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모(57)씨는 지난해 1월 회사에서 일하다 쓰러져 숨진 남편의 과로사를 규명하기 위해 질판위에 출석했다. 김씨는 최대한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나중엔 후회했다고 말했다. 그는 “산재로 남편을 잃은 지인이 ‘될 수 있으면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차림으로 질판위에 갔어야 했다’고 말했다”며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거기까지 가서 슬퍼보여야 하는지…”라고 덧붙였다.

매월 정기모임에서 정보를 교류하는 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에서도 “질판위에 갈 땐 검은색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최대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게 좋다”는 말이 오가고 있다. 강민정 유족모임 운영자는 “유족들이 그 방식이 정말 효과가 있다고 믿는 건 아닐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입증책임이 유족에게만 있고, 회사는 절대 정보를 내주지 않는 상황에서 유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과로사와 과로자살을 입증할 책임이 유족에게 있지만 유족은 출·퇴근 기록이나 직장 CCTV, 컴퓨터 접속기록 등에 접근할 법적 근거가 없다. 회사가 출·퇴근 기록 등 자료를 비공개해도 문제 삼기 어렵다. 대부분 회사는 노동자의 죽음 이후 내부 직원들 입단속에 나선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따른 상실감을 극복할 시간도 없이 질판위를 상대로 한 ‘전략’짜기에 몰두한다.

전문가들은 사업주나 정부가 과로사의 입증책임을 나눠지는 방식의 대안을 제시했다. 프랑스의 경우 자살과 업무 간 관계의 입증책임을 사용자와 건강보험공단에 부여하고 있다. 일본은 ‘심리적 부하에 의한 정신장해 등에 관한 업무상 외의 판단지침’을 만들어 업무스트레스를 평가한다.

최민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과로사 문제를 제기하는 건 유족일 수밖에 없긴 하지만 스스로를 보살피기도 버거운 이들에게 책임을 다 지우는 건 가혹하다”며 “근로복지공단 등에 충분한 조사 권한을 주고 직원들도 충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이종란 노무사는 “대법원에서 지난해 입증책임을 대폭 완화하는 판결이 나오긴 했지만 행정 일선에선 여전히 자료가 없고 증빙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업무와 질병 간 상관관계가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