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거덕 목사님이 설교할 기회를 주시는 건 전도사들에게 큰 부담이었지만 묘한 설렘도 있었다. “내가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다니…”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전도사들은 열심히 준비해 단에 올랐다.
1970년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2년 동안의 전임전도사 사역이 시작됐다. 목사안수는 1972년 서울서노회에서 받았다. 지금이야 덕수교회가 서울강북노회 소속이지만 당시엔 서울서노회에 속해 있었다. 서울이 지금보다 작았다는 뜻이다.
드디어 목사가 됐다. 1962년 부산 해양대학교에서 바다에 빠질 뻔했던 소동 끝에 김준곤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목사가 되기로 서원한 지 10년 만에 주의 종이 된 것이다. 안수자가 머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효령면에서 들리던 교회 종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모든 게 주님의 계획하심이었고 인도하심이었다. 그 여정 끝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내가 보였다. “주님, 좋은 목사가 되겠습니다. 본 대로, 배운 대로 겸손히 실천하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감사와 기쁨, 결단의 눈물이었다.
목사가 된 뒤 최 목사님은 설교 기회를 조금씩 더 주셨다. 훈련이라고만 생각했다. 훗날 생각해보니 교인들에게 날 선보이려는 배려였다. 1974년이 되자 최 목사님은 매달 한 차례씩 주일예배 설교를 하라고 하셨다. 열심히 준비해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75년 신년예배를 드린 뒤 최 목사님이 부르셨다. “손 목사, 올해부터는 매달 두 번씩 주일예배 설교하세요.” 그리고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설교단에 오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교인들과 눈을 맞추게 됐고 반응을 살필 수도 있게 됐다.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76년이 되자 아예 매 달 세 차례씩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다. 최 목사님은 한 번만 단에 서신다는 것이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님, 제가 부목사인데 매 달 세 차례나 단에 서는 건….” 물론 답은 없으셨다. 그저 웃기만 하셨다.
그렇게 또 다시 1년이 지나갔다. 그해 연말 당회는 12월에 열렸다. 당회엔 부목사들도 모두 배석한다. 최 목사님이 “이제 전 은퇴합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덕수교회 후임목사를 모셔야 하는데….” 정적이 흘렀다. “저는 손인웅 목사를 추천합니다. 장로님들께서 추천하실 분이 계시면 말씀해 주시죠.” 귀를 의심했다. 그것도 잠시, 장로님들은 “너무 좋습니다. 찬성합니다.”라며 반색하셨다. 그렇게 덕수교회 담임목사로 결정됐다.
이듬해인 77년 서울서노회 봄노회 때 나를 청빙하는 안건이 통과됐다. 내 나이 35살 때였다. 최 목사님은 그해 7월 은퇴하셨고 난 위임을 받았다. 40여년 전이지만 30대 중반 목사에게 유서 깊은 교회의 담임을 맡기는 건 파격적인 일이었다.
당시는 부목사가 담임목사직을 승계할 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이었다. 그해 9월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린 교단 총회에서 부목사가 담임목사 승계할 수 없도록 하는 법이 통과됐다. 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막자는 취지였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역경의 열매] 손인웅 (17) 목사 서원 10년 만에 1972년 ‘주의 종’ 되다
입력 2018-11-16 00:08 수정 2018-11-18 17:04